4-335 to 4- 352: 누가 골고다의 친구가 될 것인가

누가 골고다의 친구가 될 것인가
1958.10.19 (일), 한국 전본부교회

4-335
누가 골고다의 친구가 될 것인가
누가복음 23:26-43

[기 도]

오늘 저희들이 아버지 무릎 앞에 다시 모였사오나 서러운 아버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할까봐 두렵사옵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뜻 앞에 망령된 허물을 나타낼까봐 두렵사오니, 아버님이여! 합당치 못한 저희들이거들랑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여 아버지의 긍휼을 바랄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라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저희가 어찌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사오며, 아버지의 심정에 남아지는 저희가 되지 못한다면 저희가 어찌 허락한 동산의 뜻을 바라보오리까? 아버님이여!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 당신의 심정에 화할 수 있는 무리, 당신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무리가 되기를 저희들은 애초부터 마음에 그렸고, 또 그 뜻을 바라보고 나왔사옵니다.

처음엔 아버지의 심정을 체득하여 아버지를 노래하였사오나. 과정에 있어서 상처받은 심정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들의 모든 어려운 사정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처음에 아버지 앞에 각오하던 그 결심이 끝날의 복귀의 동산 가운데서 남아지지 앉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복귀의 노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었사옵니다. 이스라엘민족 가운데 광야노정에서 쓰러지지 않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애급의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올 때 아버지를 대했던 간곡한 심정이 광야 40년노정에서도 변치 않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사옵고, 나아가 아버지를 대해 충의 심정을 남긴 무리가 제2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도 저희들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맹세했던 저희들, 아버지 앞에 결심했던 저희들, 그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저희들 자체가 되어 있는 가 스스로 반문해 보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은 다가오고 있사온데 아버지를 위하여 책임질 무리가 없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탄식하고 계실 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마음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남기신 뜻, 아버지의 허락하신 섭리, 아버지의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어느 한 분야를 책임지고 나타날 무리가 없는 것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오니, 아버님이여! 저희들 이 시간 다시 아버지 앞에 속죄의 제단을 쌓아 통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광야노정에서 안식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의 무리를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는 그러한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이 시간 아버지의 손길을 불들고자 모였사오니,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는 무리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이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을 위하여 모이는 수많은 제단들이 혹시 민족과 먼 거리에, 하늘의 뜻과 먼 거리에 있을지 모르겠사오니,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야 할 섭리의 뜻이 있는 한 아버지께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권고를 듣지 앉으면 채찍을 들어서라도 그들의 갈길을 가르쳐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쳐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끝까지 남아지는 무리가 있어야 할진대는 , 아버지, 한 생명이라도 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에 화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간 탄식하신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 앞에 통회하고 아버지 앞에 복종하여 사탄 대해 싸워나갈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딸들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셨사오나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해 후회와 탄식과 원한이 쌓인 줄 아오니, 저희들을 통하여 그 원한을 푸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이 당신의 이상의 동산을 찾고자 하오니 간곡한 심정으로 역사하여 주시옵고, 직접적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성별할 것이 있으면 성별해 주시어서 아버지 앞에 영광의 재물로 바쳐지고 아버지의 허락한 제단이 깨끗해 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을 대해 수고하는 아버지의 아들 딸을 찾고 있는 이때, 그저 아버지를 대하여 자신만을 붙들고 머무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저희들, 아버지의 제단 앞에 나타날 수 없는 부족한 자체들이지만 뜻을 위해 골고다의 길을 끝까지 사수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 딸 되게 허락해 주시옵고, 끝까지 남아지는 무리들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시기와 허락한 뜻은 오늘날 저희들을 통해 나타나고 이루어져야 되겠사오나, 저희들이 뜻을 대하지 못할 때에는 아버님이 준비하신 무리를 세우시어 저희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염려치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님이여! 저희들을 통해 영광의 한날을 나타내시옵고,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기쁘심의 한날을 세워 즐거워하시는 그 한날에 저희들도 같이 즐거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여기에 모인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고자 원하지만 아버지께서 심히 거리끼실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의 허락하신 소망의 뜻을 향하여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여서 마음놓고 서로 믿을 수 있는 그 한날이 어서 속히 이 민족 앞에 나타나게 허락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락하신 뜻을 대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갖지 못하고, 아버지께서 슬퍼하는 자식들이 될까봐 두렵사오니, 오늘의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사정이 아버지의 사정과 일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소원이 아버지의 소원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으나 사나 아버지를 중심삼게 하여 주시옵고, 죽든지 살든지 아버지 것으로서 소유되어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남아진 이 시간을 아버지께 맡겼사오니 합당하신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날도 지방에 널리어 간절히 기도하는 외로운 무리들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에게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펴시옵고, 권고의 은사를 가하시어 하늘의 영광을 체휼하게 허락해 주옵시길 간절히 부탁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4-338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누가 골고다의 친구가 될 것인가’입니다.

4-338
하늘의 진리와 생명과 사랑과 이상을 갖고 오셨던 예수님
골고다라는 뜻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해골곳이란 뜻이고, 따라서 죽음의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골고다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죽음길의 친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골고다의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골고다라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성상을 연상하게 되고, 또 그 예수님의 성상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더불어 하늘이 슬퍼하셨다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시는 예수 한분을 놓고 하늘은 슬퍼했고 땅은 기뻐했습니다. 땅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고 하늘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을 위하여 가시는 예수를 하늘은 알아 주었으나 땅은 몰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서러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민족이, 하늘이 보내신 예수를 하나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아는 입장에 섰던들, 오늘날 인류역사는 이와 같이 판이한 역사를 빚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진리의 대표자요. 생명의 대표자요, 이상의 대표자요, 사랑의 대표자로 오셨지만 그가 주장한 진리와 생명, 이상, 사랑은 인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고, 타락한 인간이 소망으로 찾아야 할 진리, 타락한 인간이 가져야 할 생명, 타락한 인간이 찾아야 할 이상, 타락한 인간이 영원히 소유해야 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한 진리와 생명, 이상, 사랑을 갖고 오신 예수였는 데 그 예수가 땅에서 돌아가시고 나니 인간이 찾고 있던 진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이 찾고자 하던 생명과 이상, 사랑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 즉 그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소유한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고, 예수의 뼈와 살에 사무친 생명을 지닌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의 몸 마음이 합하여 소망으로 바라던 이상, 만민을 품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나갈 수 있게 할 수 있는 예수의 사랑을 오늘날 땅 위의 인간으로서 예수님 대신 소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진리와 생명과 이상과 사랑을 갖고 오셨던 예수님은 땅의 인간을 중심삼아 그 하늘의 이념과 사랑의 뜻을 이루려 했고, 창조주인 하나님과 통일적인 목적을 성취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이 불신하고 배반했기 때문에 그 후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진리가 간 곳이 없고,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생명과 이상과 사랑이 모두 간 곳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타락의 인연에 파묻혀 있는 인간은 참다운 말씀을 찾아 헤매야 되었고, 참다운 생명을 찾아 헤매야 되었고, 참다운 이념과 참다운 사랑을 찾아 헤매야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끝날의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과정에서 슬픔에 사무친 투쟁의 노정을 거쳐와 가지고 하나의 생명을 찾게 하는 때가 와야 됩니다. 하나의 생명의 움직임이 세계를 움직이고 하나의 이념이 세계 인류를 포괄한 가운데 공동적인 목적을 성취시킬 수 있는 때가 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세계 인류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하나로서 화하여 어느 것이든 녹여낼 수 있는 통일적인 사랑의 움직임이 끝날에 벌어지기를 ,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 또는 뜻 있는 사람들은 소망해 나왔습니다. 또 그들이 그러한 한날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개의치 않고 투쟁해 나왔다는 것을, 오늘날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슬픔과 원망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전세계 일류는 다시 한번 느껴야 할 절박한 시기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히려 그의 말씀, 즉 진리가 남아졌고, 생명이 남아 졌고, 사랑이 남아졌습니다. 그러면 이 남아진 말씀과 남아진 생명, 남아진 이상, 남아진 사랑을 오늘날 인류는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이것이 인간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최후의 문제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4-340
이스라엘민족의 무지와 불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품고 왔던 예수 자신의 슬픔은 무엇인가. 억울함이 무엇이었으며 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고통 중의 고통이 무엇이었던가. 인간을 위한 생명적이고 이념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천적인 말씀을 지닌 자신인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가는 예수의 그 심정, 생명을 다 주고 가지 못하는 예수의 그 심정, 인간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상을 주고 가지 못하는 예수의 그 심정, 천적인 사랑을 주고 가지 못하는 예수의 심정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슬픔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쳐 오면서 우리의 선조들을 세워 천륜의 뜻에 협조하게 했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시대시대마다 하늘을 배반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늘을 배반한 선조를 가진 우리들이기 때문에 오늘날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자신들도 또다시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배반의 무리가 되기 쉬운, 이런 어마어마한 기로에 서 있음을 느껴 알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모세를 거쳐, 즉 수천년 동안의 수고를 거쳐 비로소 하나의 말씀의 중심체, 생명의 중심체, 이상의 중심체, 사랑의 중심체로서 택한 이스라엘백성 앞에 약속하여 보내신 분이 바로 메시아인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 한분이 오시기를 수천년 동안 고대하고 준비하였던, 즉 역사적인 공적 위에 섰던 유대백성들은 정작 오신 메시아를 모시지 못했습니다. 역사과정의 수많은 선조들이 소망 하던, 그 역사적인 주인공으로 모셔야 할 예수였는 데, 그를 모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누우셨던 예수를 자랑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때 당시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있었는 데, 그 예언에 따라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초막 한 칸이라도 지어 놓고 기다린 무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 주님이 불시에 오시지 않을까 염려하고 그 때와 시기를 심중에 품고 준비한 어떠한 초막의 주인이 있었는 지 모르지만, 정작 메시아가 나타났을 때 모시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나실 때 예루살렘 온 성중이 소동하였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난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중이나 베들레헴 성중의 어느 한 사람,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늘의 황태자요 만민의 메시아이어야 할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누우신 가련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믿고 있는 크리스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또 하늘의 사정을 말하고 증거했던 메시아인 예수를 이스라엘민족이 몰라보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이 하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도 땅에 오시면 입을 것이 있어야 하고 살아야 할 집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늘을 믿고 있던 바리새교인, 믿고 있던 사두개인, 또는 온 유대교인 가운데는 나타난 메시아를 모시기 위하여 방 한칸이라도 준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망령되이 하늘을 믿고 나왔던 우리 선조들이 저끄러 놓은 죄상을 놓고 오늘날 우리는 슬퍼하여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러한 역사적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염려하며 하늘 앞에 호소하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메시아 한분을 보내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을 준비하였는 데, 예수의 사정이 그렇게 될 줄이야! 4천년 동안 준비한 수고는 어디 갔던가. 하늘이 약속한 하나의 택한 아들을 보냈는 데 당시 아무 것도 모르고 깊은 잠 가운데 처해 있는 유대백성이요. 깊은 잠 가운데 처해 있는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자기들의 교단을 자랑하던 무리였습니다. 또 그러면서 하늘의 뜻을 받들려고 하던 유대교단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해야 하는 인간과 뜻을 섭리해 나가시는 하나님 사이에 가로 놓여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잘 모를 것입니다.

4-342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
예수님께서는 30세에 이르기까지 목수생활을 했습니다. 만일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예수의 30년 생애의 일단을 알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좋은 밥을 먹을 때도 가슴이 아플 것이고, 좋은 옷을 입을 때도 가슴이 아플 것이며, 좋은 환경에 처해도 가슴이 아파 서글픈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데려올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요셉가정에서 자라난 예수는 의붓 자식으로 천대를 받습니다. 요셉의 아들 딸이 많아짐에 따라 예수는 점점 고립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사정과 심정을 말하지 못하고 더벅머리 총각으로서 30여 평생을 톱과 대패를 들고 남의 문짝을 짜면서 지냈습니다. 이런 예수의 사정을 어느 누가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때 당시에 예수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역사적인 예수로서, 역사 적으로 평가받는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로서 나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끝날에 나타나는 메시아를 맞을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역사적인 예수의 인격을 모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적인 예수의 인격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천륜의 뜻을 마음에 품고 이 땅을 대해 염려하는 예수였는 데, 자기 부모가 자신을 몰라보고, 형제 역시 자신을 몰라보는 이러한 서러운 입장에 처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예수를 믿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은 믿되 그런 예수부터 믿어야 되겠고. 알되 그런 예수부터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죽음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살길을 찾아오신 예수였다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돌아가신 예수님을 붙들고 우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이전에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던 그 심정을 어느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었고, 하늘 땅의 염려와 하늘 땅의 슬픔과 하늘 땅의 원한에 사무쳐 있는 자신의 심정을 어느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처참한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를 붙들고 울 수 있는 무리, 그 예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무리, 그 예수와 친구될 수 있는 무리가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웬일이뇨? 갈릴리 해변가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인 베드로가 어찌하여 예수의 수제자가 되었던가? 이것이 복통하여야 할 사실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어디 가고, 택한 민족은 어디 가고, 하늘의 뜻 가운데도 없던 난데없는 이 베드로, 또는 어부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다니 웬일이뇨? 예수는 분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영하는 유대백성이 없어서 서러워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은 주를 믿되 죽어간 예수만을 믿지 말고, 살아서 일하셨던 그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30여 평생을 통하여 하늘 뜻을 염려하신 그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노정에는 뜻을 위한 한숨의 생활이 가해 있고, 서글픔의 심정이 가해 있으며, 그 위에 또한 십자가의 슬픔이 가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고난당하던 예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땅 위에 어디 있습니까? 그의 친구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가정에서부터 친구가 있어야 하고, 형제 가운데 친구가 있어야 하고, 모든 아버지를 대신하고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친구,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 친구, 예수님이 질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는 친구,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을 대신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러한 뜻을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역사적인 뜻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가 육신을 쓴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나 시대적으로 불우한 환경 가운데서 활동하시다가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남기신 뜻을 따라 역사노정을 걷고 있는 인간들 역시 불우한 시대적 환경에 처하여 예수를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가 골고다의 십자가를 진 거기에는 전우주가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골고다의 친구를 찾아 헤매는 하늘의 심정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골고다의 심정을 알아줄 친구를 하늘이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으로, 성도들을 신부로 비유하셨는 데 예수의 신부가 될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골고다의 노정에서도 친구가 되어드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4-344
투쟁을 중심하고 본 인류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
역사적으로 보면 악이 강해지면 선은 약해졌습니다. 악이 강하여 선이 악을 인도하지 못할 때는 악이 선을 점령하면서 흘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작은 선이 나와 그것보다 더 큰 선을 이루어 선의 목적을 향하여 전진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선이 위로 올라가고 있는 이런 역사발전과정을 거쳐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정을 거쳐 사회성을 띠고 흐르고 있습니다. 집단적인 씨족의 형태를 거쳐 가지고 부족을 거치고, 민족을 거쳐 국가형태를 거쳐 세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역사는 보이는 세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우주의 세계까지 진전되어 나갈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개인은 개인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씨족은 씨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부족은 부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민족은 민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세계면 세계를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를 거쳐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작은 선이 점점 큰 선으로 전개해 나왔습니다.

따라서, 싸움에 있어서도 개인의 싸움이 가정의 싸움, 가정의 싸움이 씨족의 싸움, 씨족의 싸움이 사회의 싸움, 사회의 싸움이 국가의 싸움, 국가의 싸움이 세계의 싸움을 거쳐, 영계가 있다면 그 영계와 이 지상과의 싸움까지 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과 땅의 이 무수한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끝나야 이 우주에 평화시대가 옵니다. 이런 원칙적인 과정을 통해서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이 땅의 악한 무리와 싸워서 모든 문제를 해결지어 놓아야 우주적인 평화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싸움은 개인의 싸움이 씨족, 부족, 국가, 세계적으로 커오고 있는 데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계가 있고 하늘이 있다면 그 영계와 싸워야 됩니다. 끝날에 처한 여러분들, 마음으로 찾아드는 공포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앞으로 원자탄 이상의 공포를 느끼는 시대가 옵니다. 즉, 외적으로 벌어지는 원자시대의 공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찾아들어오는 공포의 물결이 여러분을 침범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공포심이 많습니다. 또 정신병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탄과의 싸움에 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을 끝내가지고 선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어 하늘 아버지의 싸움을 내가 붙안고, 아버지의 슬픔을 내가, 아버지의 고통을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 고통, 그 슬픔, 그 억울 함을 대신 책임을 맡기기 위한 그 한날이 예수가 다시 오는 재림의 날이요, 인류가 당하여야 할 대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노정을 거쳐온 오늘날은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이때는 국가투쟁시대를 지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세계적인 투쟁과정을 거쳐나갈 때이니, 앞으로 어차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가 어찌하여 이런 과정을 거쳐나오게 되었느냐,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오른편에 있던 강도와 왼편에 있던 강도의 형태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른편 강도는 하늘편을 대신한 세계적인 민주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왼편 강도는 하늘을 반대하고 물질과 인간을 중심삼은 세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날 것은 무엇이냐? 예수의 죽음과 더불은 부활의 고비가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인 왼편 강도가 출발하여 가정적으로 벌어졌고, 이것이 씨족을 거쳐 부족과 민족, 국가,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오른편 강도형도 역시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한자체가 땅에 뿌려짐으로써 그 결실이 끝날에 있어서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염려할 것은 민주주의가 어떠한 입장에 세워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돌아가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찾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갖지 못한 이 민주주의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민주진영에 속해 있는 우리들은 자기는 천만번 죽어 마땅한 것으로 알고, 예수님의 죽음을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오른편 강도와 같은 사람이라도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할 때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4-346
골고다의 친구가 되어야 했던 베드로와 12제자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기독교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역사의 결론적인 현상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결론을 맞추기 위하여 어떠한 역사과정을 거쳐 왔는 가를 기도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아버지여! 이 민족이 택한 민족으로서 세계의 복을 받게 하시옵소서. 유대교를 심판하시옵고 불신의 반열을 심판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것이 예수가 겪으셨던 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품은 그 분함은 무엇이었던가. 택한 유대교가 예수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를 못박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분하고 원통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슬픔이 컸지만 4천년 동안 피눈물의 제단을 쌓는 과정을 걸어오신 하나님의 사정을 생각하고, 4천년 동안 택하여 길러오셨던 유대백성이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 자신의 죽음도 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오늘날 흩어져 있는 세계기독교인들은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예수가 손을 들어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유대 나라가 먼저 심판을 받았을 것이요, 유대교인이 먼저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늘이 여유의 과정을 남겨 놓아야 죽어가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넘어올 것을 바라서 복을 주고 가신 예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 오른편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서럽고 서럽습니다. 4천년의 하나님의 슬픔이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던 민족……. 이건 슬픈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예수님 앞에 그저 널려져 있는 수많은 민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에 같이 동하고 정하여야 할 무리가 바로 유대교인이고 유대백성이어야 했는 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피를 같이 흘려야 할것인데 오히려 여기에 살인강도가 동반한 것이 웬말인가.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로되 불쌍한 구주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동반자가 살인강도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민망한 사실입니다.

골고다의 친구가 베드로가 되었던들, 12제자가 되었던들, 하늘의 한은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되었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12제자가 단결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죽고자 했으면 기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안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3년동안 택한 민족을 바라보고 서러워하시던 예수, 3년 공생애 기간에 이 땅의 인류를 위해 우시던 예수, 그 예수에 소망을 걸었던 민족은 어디 갔던가? 바라보고 있던 교회는 어디 갔던가? 3년 공생애 기간에 희노애락을 같이하며 따랐던 제자들은 어디 갔던가. 그들은 자신이 좋고 즐거울 때는 , 나는 예수의 친구요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예수의 입장에 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 예수의 가는 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입장에 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새로운 역사의 출발의 뿌리가 되어 그러한 모양으로 역사는 발전되어 오늘의 끝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복을 누가 받았느냐. 따르고 있던 12제자도 아니요, 하늘을 믿고 있던 유대교인도 아니요, 축복을 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같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간 오른편 강도가 역사적인 축복을 받아가지고 수제자보다 먼저 낙원에 임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만일에 살인강도 중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죽음의 날에 동참을 하지 않았던들 구원섭리는 좌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인강도의 뿌려진 피가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지상에서 복지 낙원을 건설하는 조건을 천운과 더불어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땅 위에 다시 나타나 불신했던 백성을 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한분을 죽음의 자리에서 신랑으로 맞이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터전으로 말미암아 선의 열매가 반드시 지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대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선을 치는 데 있어서 그 선의 씨알맹이까지 쳐서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을 위한 희생과 죽음의 자리에서 설 뿐만 아니차 그 선을 붙들고 쓰러지는 충절의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 쓰러진 그 한 자체로 말미암아 몇배로 선이 번식되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 당시 반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면 망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사탄권에서 다 빼앗은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오른편 강도를 조건으로 하여 부활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4-348
넘어야 할 골고다의 노정
사탄은 예수와 오른편 강도를 치고 또 열두제자를 쳤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열두제자를 쳤습니다. 하늘은 열두제자도 다 사탄 앞에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쳐야 했는 가? 예수의 노정은 개인적인 골고다의 노정이로되 예수님이 골고다의 노정을 가심으로 말미암아 열두제자도 골고다의 노정을 가야 했고, 유대백성도 골고다노정을 가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도 골고다노정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이 골고다노정을 가야 하는 것이요, 온 인류도 이 골고다노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민주세계는 민주주의를 중심삼아 예수가 넘던 세계적인 골고다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라고 기도하셨던 것은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슬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죽으면 나로 말미암아 온 세계인류도 십자가의 골고다노정을 넘어야 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 : 39)”라는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골고다노정을 넘지 않으셨다면 세계적인 골고다노정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사명자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골고다노정을 넘고나니 그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즉 개인에게는 개인적인 골고다노정이 남아졌고, 가정을 중심삼은 섭리적인 때와 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골고다노정이 남아졌습니다. 또 가정시대를 지나가지고 섭리의 뜻이 점점 확대되어 사회의 단계로 올라갔을 때에는 가정의 십자가의 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십자가의 길도 남아졌었습니다.

또 국가적인 섭리의 뜻을 믿고 받드는 국가적인 섭리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의 십자가, 사회의 십자가, 국가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적인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다면 세계에 대한 십자가, 국가에 대한 십자가, 사회에 대한 십자가, 가정에 대한 십자가, 개인에 대한 십자가 전부를 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의 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주를 맞고자 하느냐. 하늘이 있다 할진대 예수를 어디서 만날 것이냐.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 가지고 부활한 자리에서 만나야 됩니다. 이것이 재림부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왔다간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향한 골고다의 노정을 걸으면서 밀치고 때리고 맞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민주진영이 공산진영에게 맞는 때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적인 골고다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서로 이 민족을 위한 사무친 심정을 품고 이 민족 전체가 한 몸과 같이 움직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한 이 민족이 되기 전에는 넘기 어려운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악한 자리에서 하나의 선의 뿌리 또는 선의 결실을 찾아 세워야만 악한 죄인으로부터 선한 사람까지 하나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한을 의지하여 잃어버린 12제자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개인이 예수를 대신하고 12제자가 예수를 대신하여 맞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으므로 12제자가 대부분 다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12제자가 죽음의 길을 나서게 될 때, 제자 끼리끼리 몰아낸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 데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도 한 사람은 유대교가 몰아내고 이스라엘민족이 몰아내고 배반한 12제자가 몰아내는 가운데 처하였습니다. 하늘이 세우신 민족 가운데 예수님 한분을 세웠고, 또 그 분의 부활로 12제자를 다시 세웠습니다. 나아가 하늘은 그 12제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과 같이 몰림뱅이 한 사람을 세우셨는 데 그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4-350
바울을 중심한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
오늘날 기독교인은 바울이 하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바울은 12제자한테 몰렸습니다. 사도라고 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바울은 12제자들로부터 몰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하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배반한 사도가 아닌, 배반하지 않은 산 사도의 입장에시 이방나라인 로마에 가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12제자의 순교를 대신하여, 세례요한의 죽음을 대신하여 주를 찾았기 때문에, 땅 위에 있어서는 섭리적인 궤도가 이방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리하여 바울은 로마제국에 들어가 혼자 몰림을 받게 됩니다. 종교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서 정하신 섭리의 뜻 하나를 품고 인류의 십자가인 골고다의 길을 가신 것과 같이, 로마의 어떠한 핍박의 화살에도 굴하지 않고 꿰뚫고 나아갔습니다. 하늘의 뜻을 위하여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가는 모습이 예수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을 중심삼고 기독교는 움직여 하나의 가정형을 거치고, 부족형을 거쳐 민족, 국가, 세계형으로 거쳐 나옵니다.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간 것 같이 바울이 하늘의 사명을 짊어지고 12제자 대신 사탄세계를 대하여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자진해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네로황제시대의 극심한 핍박과 학살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개인적인 바울의 희생이 그때의 부족들, 또는 12제자와 같은 사람들, 이스라엘과 같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으로부터 전체가 하나로 뭉치어 죽음의 자리를 넘어 싸웠기 때문에 로마나라를 빼앗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약 4세기를 지내는 동안 기독교는 번창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사회시대에 있어서 로마교황청을 중심하여 기독교는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세계를 기독교인들이 지배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로마 가톨릭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 즉, 국가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서 세계적인 무대를 개척하여야 할 사명이 있었는 데, 이것을 모르고 국가적인 이념의 욕망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늘이 치는 것입니다. 문예부흥을 통하여 들이칩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고루한 의식을 깨뜨리고, 나아가 법황청이 근본적으로 몰림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몰락되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자들 가운데 새로운 혁신세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루터를 중심한 반항자들이고 신교도들입니다. 구교를 중심삼은 무리를 들이치는 과정에서 그 맞는 무리 가운데, 몰림받는 무리들이 루터를 중심한 신교, 즉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퓨리턴들이 미국에 가 신대륙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적인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역사가 이렇게 흘러나왔지만 이제는 하늘이 세계를 들이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들 가운데 몰림받는 무리가 어디 있을 것인가 살펴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주진영 가운데 제일 몰림받는 무리, 민주진영 가운데 제일 불쌍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찾아 보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피흘리는 십자가상에 있어서 강도가 친구되었던 것과 같이 세계적으로 들이치는 골고다의 노정을 거쳐갈 그때에 있어서 배반하였던 유대민족과 친구가 아닌 하나의 무리, 하나의 국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 그러한 국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섭리관에 비추어 볼 때에 타당한 것입니다.

4-352
몰림받는 무리를 중심삼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날 세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을 불신하는 공산주의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들이치는 죽음의 마당에 예수의 편이 되었던 오른편 강도가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공산주의가 자기들의 모든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학살주의로 나가고 있는 데, 그 학살이 민주진영의 편 될 수 있는 조건의 제물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렇게 온 인류를 골고다노정으로 몰아내는 데, 이 길을 넘어야 할 오늘날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세계 앞에 골고다의 길을 먼저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온 기독교의 선봉에서 몰림받는 무리, 사도들 앞에 몰림받았던 바울, 유대인 앞에 몰림받았던 강도, 로마교황청 앞에 몰림받았던 신교가 있었듯이, 오늘날 세계적인 신개혁파의 입장에서 몰림받는 무리들이 나오지 않을 것인지 항상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20세기의 새로운 개혁종교 단체로서 20세기의 모든 주의와 사상으로부터 몰림받아야 합니다. 민주 진영, 교파주의적 상황의 이 세계에서 몰림받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늘의 이념을 갖고 나온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도 역시 세계 앞에 강도와 같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3·8선을 중심삼고 6·25동란을 통해 세계의 생사 운명을 걸어놓고 좌익과 우익이 부딪쳐 피를 흘리는 입장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오늘날 민주주의의 골고다노정이 오른편 강도의 신세와 비슷하지 않다고 말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민족 앞에 한이 있다고 할진대는 , 이제 무엇을 붙들어야 할 것인가? 주님의 사상을 붙들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예수의 골고다의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뜻을 알고 민족이 배반한 심정, 역사적인 배반의 심정, 세계적인 배반의 심정을 지니고, 당신이 고난길을 가지 않게끔 내가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민족이 예수의 영광을 찬양하겠다는 심정을 지니던 오른편 강도와 같은 일면의 심정을 지닌다 할진대는 , 골고다의 죽음길에서 다시 사신 예수를 맞아 가지고 부활의 영광시대에 들어가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의 여러분들, 핍박받는 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몰리고 몰리다 보니 예수의 심정을 알겠고, 예수를 만나고 보니 죽음의 골고다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동산에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드리던 심정까지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몰림의 극단에 서가지고 하늘과 일치하여 부활의 은사를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몰림받는 다면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적인 이념을 가졌다 할진대, 세계적으로 몰리고, 국가적으로 몰리고, 교회적으로 몰리고, 사회적으로 몰리고. 가정적으로 몰리고, 개인적으로 몰리지만, 여기에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만 우주적인 부활시대에 우주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가지고 오시는 주 앞에 신부의 자격을 갖고 부활의 권능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본연의 아들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들은 참다운 친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참다운 가정과 참다운 스승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참된 주의,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찾아 헤매였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중심삼고 보면, 여러분은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입장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참된 친구를 찾고자 원할진대는 , 친구의 골고다에 있어서 참된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겠고, 참된 가정을 찾고자 할진대는 가정의 골고다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국가 또는 세계적인 골고다의 노정에 있어서도 여러분은 예수와 같은 심정을 품고 골고다의 길을 책임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생명문제를 맡기고 의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를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세계적인 골고다의 노정에 있어서 하늘 앞에 친구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