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6 to 4-312: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하는 자가 되자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하는 자가 되자
1958.10.05 (일), 한국 전본부교회

4-296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하는 자가 되자
마태복음 22:34-40

오늘은 여러분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하는 자가 되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나 존재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은 어떤 것을 막론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존재하는 이 세계를 벗어나서는 그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관계지어진 세계에서는 동기와 목적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4-296
관계의 세계를 해명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
우리 인간들은 이런 관계의 세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피조물인 연고로,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마당에 있어서나 일생의 생애노정을 허덕이면서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이 다 관계의 세계에서 움직여 나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이 관계의 세계를 실험을 통해서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고, 철학은 이 관계의 세계를 논리적인 측면에서 해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나오고 있으며, 역사학은 이 관계의 세계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는 이 관계의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여 나오고 있는 가? 지금까지 종교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절대자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해명하기 위해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 개체 개체는 지극히 작은 존재로되 지극히 큰 가치의 이념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애노정을 거쳐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본심은 더 큰 생명의 노정을 바라고 있고, 더 큰 이념을 바라고 있고, 더 큰 사랑과 정을 바라는 것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 인간은 공통적인 관계의 기준을 바라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 생명이 있으되 이 생명보다 더 큰 생명, 오늘 내가 생각하는 소망이 있으되 그보다 더 큰 소망, 이념이 있으되 더 큰 이념, 오늘날 내 생활에 있어서 심정을 통하여 느껴지는 정보다 더 큰 정의 경지를 찾아 헤매는 내 자신인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더 큰 생명과 더 큰 이념과 더 큰 정의 경지를 요구하게 되는 고!

그런데 이와같이 더 큰 것을 요구하는 이 땅 자체가 관계적인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댄 우리들의 생명의 동기가 되는 더 큰 어떠한 생명체, 이념의 동기가 되는 더 큰 어떠한 이념체, 또는 우리의 정적인 것보다 더 큰 어떠한 정의 본체가 있다는 사실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생명의 힘이 뻗어나가 마침내는 우주의 만상을 꿰뚫을 수 있는 그 한 날을 어느때에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또 내 이념의 욕구는 온 피조만물을 천리법도에 따라 주관하는 것인데, 그럴 수 있는 소망의 존재는 어느 날에야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녹여낼 수 있는 심정의 힘은 어느 날에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이런 문제를 다시 한번 상고해 봐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내 생명의 힘은 오늘을 넘어 내일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즉,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이념의 힘도 역시 마찬가지요, 심정의 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주는 존재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관계를 중심하여 동기와 목적을 설정해 주셨는 데, 우리는 그 관계를 중심한 동기와 목적을 이루는 영원한 가치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인식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생명의 힘, 이념의 힘, 심정의 힘이 절대자의 이념과 절대자의 심정과 절대자의 생명력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자체는 생명의 가치를 갖고 있는 듯하나 이 존재세계에서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4-298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의 문제점
그러면 오늘날 과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학이나 종교를 통하여 최후로 만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명해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공통문제점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에게도 공통된 문제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늘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이고 하늘이 정하면 나도 정할 수 있는 불가분의 일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 기준을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내에서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역사적이고도 시대적이며 미래적인 공통의 문제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의 어떤 사람이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욕구와 이념에 대한 욕구와 사랑(심정)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세 가지 욕구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생명과 이념과 사랑(심정)의 욕구를 한 날의 생활과정에 있어서 일시에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진리면 진리, 그 하나의 주의면 주의, 그 하나의 사람이면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늘날 역사는 총동원하여 움직이고 있고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고의 역사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힘과 모든 존재 세계를 대하여 움직일 수 있는 자동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 이 모든 인연의 세계, 즉 관계의 세계와 소망의 인연을 맺게 하며 소망의 자극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동기가 있어야 될 것인데, 그것을 여러분은 갖고 있는 가. 또 여러분은 그 하나의 동기와 내가 맺은 관계의 권내에서 세계만상을 움직일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는 가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온 우주의 모든 이념을 자신의 심정에, 하나님의 창조의 전체의 이념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며 하늘이 틀림없이 이렇게 움직이니 어떠한 존재물, 어떠한 물건이라도 망각할 수 없다는 그런 심정과 그러한 느낌을, 그러한 직관 또는 직감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을 갖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자신들이 오늘날 찾아나가는 소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사무치는 어떤 크나큰 사랑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찾아가고 있는 인간적인 어떠한 사랑이 아니라 내마음에 있는 본심이 바라는 천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영원을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력과 이념을 꿰뚫어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흠모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그 자체 전부가 사랑의 심정으로 화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생활하는 환경과 내가 살고 있고 바라보고 있는 이 우주를 품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이런 사랑의 경지와 인연을 맺는 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인생행로에 있어서의 최대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라 말하고, 절대자라 말하고, 또는 능치 못함이 없는 분이라고 시인하면서 어찌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절대적인 선을 사모하는 마음이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사랑의 마음보다도 낮아지게 되었느냐? 이것이 오늘날 하늘의 탄식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사랑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렇게 대해 주지 못하는 자리에 계시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으로 인간을 대하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권내에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충격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잊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슴에 맺혀 있는 모든 비애를 녹여낼 수 있는 그 사랑의 힘과 인연을 맺는 다면 하늘을 배반할래야 배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선을 계획하고 가르치고 하는 이런 문제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4-300
인간이 절대적인 사랑과 선과 관계를 맺지 못한 이유와 그 결과
그런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런 절대적인 사랑과 선과 인간이 관계를 맺게 하지 못하셨던가. 그 문제를 놓고 저 역시 많이 생각하고 고심한 사람 입니다. 하나님이 본래부터 그런 하나님이었느냐? 아닙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바라기 전에 내 속에 소망의 실체로 임재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내 앞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적이고 이념적이며 생명적인 그 기준까지 도달 하지 못한 것이 타락이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슬픔이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진리와 생명을 찾아 헤매고 있고, 이념을 찾아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내 자신의 생명력과, 내 자신의 이념과, 내 자신의 정적 심정기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래야 아니할 수 없고, 나아가 하나님이 전체의 이념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천주의 생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느낌을 갖고 자신의 생활권내에서 자극시켜 주는 관계와 인연을 맺었다 할진대는 , 하나님이 영생이면 여러분도 영생이요. 하나님이 움직이면 여러분도 움직이고 하나님이 정하면 여러분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망의 기준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역사를 회고해 보면, 인간들을 자기들이 갖고 있는 어떠한 힘을 통하여 이 세계를 움직이려 했습니다. 생명력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것을 움직이려 했던 시대가 있었는 데 그런 시대가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시대가 다 지나간 오늘날은 어떠한 시대가 되었는 가. 이제는 예수의 이념을 계승한 사상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지나간 후에는 어떠한 시대가 올 것인가, 또 그 후에는 어떠한 시대가 올 것인가. 생명력의 기준을 지나고 이념적인 기준을 지나선, 절대 자의 사랑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된 중심이 인류 앞에 나타나는 시대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저 하나의 소망과 이념을 소개해 주는 역사에 그쳤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 각 개인의 심정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부활과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생명력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의 종국인 정적 천국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바라고 있는 최후의 소망의 기준은 무엇일 것인가? 정적인 역사관, 정적인 인생관, 정적인 우주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여 성경의 중심은 예수요, 예수의 중심은 사랑이요, 사랑의 중심은 신랑 신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한 사실이 이때까지 허덕여온 전인류 앞에는 무엇보다도 복된 희소식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심정이 이 세계에 꽉 차 가지고 그 심정의 동함을 통하여 여러분이 혈육을 통해 가지고 혈통적인 죄악의 근원을 밝히게 될 때, 오늘날 인류는 평화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여러분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남편이 부인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모두 관계적인 이념을 통하고 동기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큰 부모의 사랑의 원칙이, 더 큰 부부의 사랑의 원칙이, 더 큰 자녀의 사랑의 원칙이 본래부터 인간과 인연이 되어 있고, 관계가 맺어져 있었는 데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칭하여 신랑 신부, 즉 사랑을 중심한 신랑 신부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이 찾고 있는 사랑은 인간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높고 더 큰 생명을 움직여갈 수 있고, 더 큰 이념과 화합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서 빨리 이 땅 위에 시간성을 초월하여 어떠한 무엇이라도 소화하고 감화시킬 수 있는 생명력과 소망의 힘과 사랑의 힘을 볼 수 있는 날이 와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악이 선에 흡수되어 뒤따라 올 수 있는 세계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4-302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과 소망과 사랑의 실체
그러면 우리가 관계의 세계를 통하여 절대자로서 실존하는 하나님을 헤아려보아 그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할 수 없다 할진대는 , 그 하나님도 역시 우리와 같은 생명력의 움직임을 갖고 있고, 이념적인 움직임과 정적인 움직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태어나고 그의 이상적인 존재로 지음받은 우리이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전체적인 모든 속성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 자체 앞에 생명의 주체로 나타나야 할텐데 안 나타나고, 소망의 주체로 나타나야 할텐데 안 나타나고, 사랑의 주체로 나타나야 할텐데 안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탄식이요 인간의 서러움인 것입니다.

이것을 대신해 주고 보충해 주기 위해서, 이 곡절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고충을 해명해 주기 위해 이념의 주체가 되는 실체, 정의 주체가 되는 실체, 생명력의 주체가 되는 실체를 보내 주셨는 데,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실체로 계시지만 그 관념의 세계에 있어서 직관적인 어떤 우주관이 있을 것이고, 직감적인 동시에 직각적으로 느끼는 원칙의 세계를 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권은 무엇을 통하여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과학도 아니요, 철학도 아니요, 인간의 어떤 지적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이것을 해명지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종교를 세워 관계와 인연을 중심삼고 인간의 마음의 터전을 움직여 가지고 하나님, 즉 절대자의 동기와 목적을 해명시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기와 목적을 해명시키는 데는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논리적으로 이념 그 자체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듯이, 사랑 그 자체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생명에 대한 관을 세울 수 없습니다. 생명관, 역사관, 종교관, 무슨 관 등을 세우려 하지만 세울 수 없고 사랑을 대해서도 어떤 관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분은 어떠한 관이라는 것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는 상대적인 기준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상대적인 기준을 가질 수 있을 만한 해명의 조건을 찾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관보다도 앞서는 , 그 무엇이라도 해명할 수 있는 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직관이라는 명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관 또는 직감이라는 말 혹은 직각이라는 말, 이것은 오늘날 오관을 통하는 인식의 세계에서 해명할 수 없는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직관, 직감, 직각이라는 것은 어디를 통하여 움직이고 느껴지는 것인가? 외부로부터 오관을 통하여 느껴지는 감각과 느낌이 아니라 마음을 통하여 들어오는 감각과 느낌인 것입니다. 그 직관적인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여 순식간에 원인과 동기를 해명할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실존적인 존재성을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문제를 우리들의 마음을 위주하고 풀 수 있습니다. 즉 초자연적이고 법칙적인 어떤 직관 또는 느낌을 통해서만이 이를 해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연과 관계의 문제로 되어 있고, 이 관계와 인연은 또 어떤 동기로부터 목적을 향하는 과정에 머물러 있는 데, 그 과정에는 역사성이 내포되어 있고, 시대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미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모든 느낌을 오늘날 우리는 종교를 통하여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체득한 그것이 하나님이 갖고 있는 생명의 속성, 이념의 속성 또는 사랑의 속성과 같은 그러한 힘의 자극을 여러분 자체에 일으켜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종교라야만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을 수 있는 종교일 것입니다.

그러한 종교를 오늘날 우리들은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관계의 성향을 통하여 논한다는 입장에 서서 보게 될 때, 틀림없이 그러한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체득해야 할 것이냐 하는 , 이것이 문제입니다.

4-304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종교를 통하여 무한한 존재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데, 즉 여러분 자신이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 그 세계를 찾고 있으나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러분이 그 세계를 추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것은 관계를 중심 삼고 볼 때 동기와 목적이 어긋나 있는 데 있고 그 결과적인 가치와 여러분이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개인이 있으면 개인의 어떠한 소원이 있고, 또 가정이 있으면 가정, 나아가 민족과 국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각기 처해진 각 분야 분야에 있어서 그 바라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존재물의 목적이 천륜의 목적과 다르다면 영원한 존재의 세계는 도저히 느낄래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오늘날 종교를 세워 인간에게 그러한 세계를 느끼게 하는 데 어떤 진리적인 조건을 통하여 느끼게 하지는 않습니다. 최후의 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의 표어를 세워서 그 세계를 접촉시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서만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도 그 사랑을 가지고서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인간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사랑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무한히 노력하시면서 우리를 찾아 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우리가 있기 전에 먼저 계셨으며,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하여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 가치보다도, 우리의 이념에 의한 가치보다도, 우리의 정적인 가치보다도 더 큰 존재가 우리들 자신보다 먼저 존재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랑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 데 어떻게 찾아오시는 가? 봉독한 성경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하늘은 인간들이 지키기 이전에 먼저 지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늘날 타락한 인간이 지켜야 할 첫째 계명임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말씀이 나에게서부터 인연 되어 시작되는 줄 알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 말씀을 인간 앞에 나타내기 위해서 인간의 생명의 주체이시며 이념의 주체이시며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늘이 먼저 인간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한 역사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그 계명을 지키기 전에 우리를 대하여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입장에서 인간을 붙잡고 사랑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지키셨기 때문에 계명으로 세우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이념을 찾는 데 있어서도 그 생명의 이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이 우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념적인 존재로 세우시기 위하여 크나큰 사랑과 크나큰 이념과 크나큰 생명을 갖고 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첫째 계명의 뜻을 세워서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그러한 뜻을 인간 앞에 제시했으나 인간이 무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 고로 그 계명의 말씀을 실체적으로 완성하고 그 계명의 법도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4-306
하나님을 위해 마음과 뜻을 다한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대해 마음을 다하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다했고, ‘뜻을 다하라’하기 전에 먼저 뜻을 다했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기 전에 먼저 이 계명을 실천하여 그 계명의 실체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지한 인간을 대신하여 하늘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씀으로 증거하였는 데 듣지 않으니 손을 들어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력을 증거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종족, 자기 민족을 중심삼아 행복을 바라는 민족 앞에 세계와 천주적인 이념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그런 이념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유대민족 앞에 우주적인 사랑, 자기 민족을 넘어 이방사람들까지도 사랑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들을 수 있게 증거하고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 앞에 그 위대한 생명력의 감촉을 받은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사망을 이긴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소망의 힘을 느낀 사람이 누구였느뇨? 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위대한 사랑의 힘을 느낀 사람이 누구였느냐? 이도 역시 사망을 이긴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를 믿어 그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사랑의 힘을 갖추어야 할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체를 보내 놓고 나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이상의 생명체요, 이상의 이념체요, 사랑의 본체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망의 고개도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히 넘어서게 되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오셨던 예수를 믿는 자체로서 또는 가신 예수를 믿는 자체로서, 예수를 소망의 대상으로 믿는 자체로서, 어떤 단계에 위치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인간 앞에 실체적인 이념의 존재, 사랑과 생명의 본체로 나타났으나 당시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와 같은 그러한 입장에 처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역사적인 범죄를 다시 범하는 것이며. 예수님 이후 2천년 동안 섭리하신 하나님의 서러움의 본체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소망으로 오시는 그 예수님 대신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력을 과거를 위해서,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바칠 수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믿고 있는 사람은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이 믿는 다고 하고 있는 데 그 신앙의 기준이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접하여 무한한 생명의 감촉을 받고 무한한 창조의 이념 세계를 바라보니, 또 무한한 사랑의 힘을 감촉하고 바라보니,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대하여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녹여낼 수 있는 사랑의 불꽃을 일으켰던 분이었습니다. 원수들의 과분한 욕망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어떤 분풀이를 다 당할지라도 그 이상의 것으로써 포용하셨을 때, 즉, 더 큰 이념과 더 큰 생명력의 심정으로 폭발시켜 나가셨을 때, 세계는 모두 그의 품으로 휩쓸려 들어오게 되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생명력과 이념과 사랑이 있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생명력과 이념과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죽음의 고비에 있는 사람이나 생명권에 있는 사람 등 전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사람을 통일할 수 있는 사랑과 생명의 본질적인 실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또한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는 복된 소리, 왈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 것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실체를 갖고 우리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신 분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실체가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발자취는 어떠한 발자취였던가? 인간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신 발자취였고, 뜻을 다하신 발자취였고, 자기의 성품을 다해서 인간을 붙들고 사랑하시기 위한 발자취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설명을 넘어서 직감적으로 체휼할 수 있는 심정이 되어 있느냐 안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심정의 유무에 따라서 하늘은 여러분과 인연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4-308
메시아가 오시는 날과 하나님의 사랑시대
심정의 세계는 시간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위대한 혁명가도 혁명을 못했고, 시대적인 변천 속에서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부모 앞을 떠나게 될 때에 어떠한 권력자가 나타나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가로막아도 사랑의 세계를 찾아가는 움직임은 막을 수 없습니다. 태산 아니라 온 우주와 같은 것으로 가로막아도 그것을 넘어서 왕래할 수 있는 움직임은 정적인 세계의 움직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심정적인 체휼을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심적 기준을 통하여야 됩니다. 2천년 전 인간을 구원하려 하셨던 예수를 오늘의 우리 앞에 필요한 예수로서 받아 들일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움에 있어서도 그것은 심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르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천태만상의 사정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정을 넘어 그 사정 밑에 있는 심정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줄 알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생명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가 완전한 해답이요 완전한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력과 이념과 사랑의 주체자로 인간의 중심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그 한날이 하늘이 기뻐하는 날이요, 만 우주가 기뻐하는 날이요, 온 인류가 기뻐하는 날입니다. 또 인간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회복하는 날이요, 하나님은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하는 날이며,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가 오시는 날은 세 조건이 일시에 찾아져서 하나의 마음을 통하여 동하고 정할 수 있는 하나의 실존 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인 연고로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소망의 날이요 ‘인간의 소망의 날이며, 만물의 소망의 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망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체를 표상한 사랑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6천년의 끝날에 처해 있는 내 한 자체를 세워서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이념을 소유해야 할 시기는 가까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성신의 생명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생명시대, 예수와 성신의 이념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이념시대, 예수와 성신의 사랑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사랑시대는 어느때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 3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종국인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인연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의 과정을 거쳐 들어가게 될 때에야 비로소 참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있는 타락한 부모.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참부모가 아닙니다. 우리는 타락한 혈통의 부모를 다 갖고 있습니다. 암만 외모가 잘났다고 해도 타락의 후손인 고로 타락의 혈통을 받은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들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참부모의 사랑, 이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주기 위해 남기신 마지막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랑을 소개해주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느낀 후에야 어떤 원칙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있은 연후에 자녀가 있고, 그 자식이 장성하여 부부가 되고 다시 부모가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념은 어떤 것입니까? 신랑 신부의 이념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참부모의 사랑을 찾아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참부모의 사랑과 혈통적인 인연의 관계를 갖고 장성한 후에야 우리들로서 가질 수 있는 참부부가 있을 것이고 참자녀가 있을 것입니다.

4-310
직계자녀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노정
오늘날 타락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참부모가 없고, 참부부, 참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타락한 인간들이 양자의 모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양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계의 자녀가 변하여 양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직계 자녀를 회복하기 위한 서글픔의 역사노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서글픔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사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이 땅 위에 나타나면 우리에겐 선에 대한 이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내 자체가 선의 본체이면서도 오늘날 내 자신은 그 중심에 의한 상대적인 생활관 밖에 갖고 있지 못합니다. 모든 것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가치의 중심, 생명의 중심, 이념의 중심,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에서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이것을 조성시키려 하나 제각기 사정이 다릅니다. 또한 그 사정은 단순한 사정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정입니다. 이 사정이 역사과정의 인간들에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무지무지한 투쟁의 역사, 무지무지한 혈투극을 낳은 비극적인 역사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하나를 찾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가치만큼 먼저 사탄으로부터 맞는 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가치 만큼 하나님은 먼저 맞고서야 세계를 빼앗아 온다는 것입니다. 찾는 만큼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법이었고 하나님의 사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명의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먼저 죽는 자리를 거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시는 죽을 자리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살리기 위하여 죽을 고비를 찾아 넘으셨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절망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갖고 무한한 슬픔과 고통의 고개를 넘으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한 개체가 소망했던 사랑의 이념을 소개하기 위하여 6천년의 서글픈 역사노정을 거치셨으며, 오늘도 나 한 개체와 인연을 맺고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느껴질 때 비로소 여러분은 역사적인 모든 선지선열들의 사정, 또는 옛날 노아와 같은 심정을 공통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아브라함을 중심한 생명역사와는 거리를 갖고 있으되 심정의 세계에서는 거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 심정으로 통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시대와도 역시 마찬가지고, 예수시대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예수와 성신을 세워서 2천년 동안 섭리하신 하나님의 그 곡절의 심정과 오늘의 내가 인연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심정의 귀일점을 세운 사람으로서 서게 될때에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그를 세워 신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너희는 종이 아니라 나의 형제’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이것을 알게 될때에 나에게 슬픈 일이 있어 내가 슬퍼하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슬퍼하신 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분하고 억울할 때에는 아버지의 분함과 억울함이 먼저 있었고 내가 낙망할 때에도 아버지가 먼저 낙망한 자리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4-312
하나님의 직계자녀로 설 수 있으려면
이러한 입장에서 자식된 도리로 슬퍼하는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 나를 대하여 슬퍼하지 마시고 기뻐하십시오’라고 위안할 수 있는 그런 참아들딸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나를 위한 것으로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으로 해야 되겠고, 우리의 몸 마음을 대하여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할 줄 아는 참아들딸의 심정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 분이 그런 심정을 지니고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길에 나간다 할지라도 ‘아버지! 내 오늘의 죽음의 고통이 비장하오니, 이 슬픔의 길을 피하게 하시옵소서!’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기 한 몸의 죽음의 고통을 피하려고 혹은 염려하여 공포에 싸여서 기도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4천년 동안 예수 하나를 찾아오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비고비를 넘으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될 때에, 자기 일개인의 죽음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 39)”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정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 여러분들! 자신의 사정을 붙들고 울지 마십시오! 각자의 사정은 천태만상이로되 오직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고, 나를 위하여 먼저 우신 아버지를 눈물로써 위로할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하게 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권내에 품기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이 고개를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즉, 여러 분이 죽지 않은 실체를 쓰고 부활권을 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체세계에서 참아버지를 대신하여 모든 만민을 사랑해 주고, 또 만민이 아버지 대신 그러한 여러분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그때가 되어야 오늘날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신 그 이념의 종결을 볼 수 있고, 오늘날 인간을 대한 섭리의 종결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이 지금까지 소망했던 그 소망도 종결을 볼 수 있고 내 사랑과 생명에 대한 섭리도 종결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이루어져야만이 나를 찾기 위해 수고하신 하나님의 심정, 고통당하신 하나님의 심정, 억울하고 분하고 서글픔을 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또한 오늘날 슬픈 사정의 손길을 붙들고 우시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까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붙들고 이 땅 위에 하늘의 이상을 완성하고 기뻐하려던 그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의 수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막혀진 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랑의 손길을 붙들고 나왔지만, 붙들린 자식과 붙드는 아버지가 환희에 넘쳐 본연의 꽃동산을 이루어 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그 장면은 인간세계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슬픈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런 자리에 처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슬프고 기쁜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는 사람이라야만, 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아니라 직계의 자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