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3 to 4-259: 남은 무리에 참예하자

남은 무리에 참예하자
1958.06.29 (일), 한국 전본부교회

4-253
남은 무리에 참예하자
로마서 9:25-29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신 것과 같이 피조물도 영원한 이념을 두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민족과 인류, 그리고 만물이 영원한 피조물로서 남아지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은 그것들을 오늘날까지 슬퍼하며 찾아나오고 계십니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이상의 동산을 잃어버린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피조세계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시지 않고 원대한 창조의 이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랜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사탄과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나오셨고, 오늘날까지 참아나오신 것입니다.

4-253
남아진 소망과 이념의 상속자
하나님에게는 이런 크나큰 소망이 있지만 반면 지극히 작은 것부터 찾아야 할 서러움이 있습니다.

이 크나큰 소망이 개인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는 데 개인이 타락하여 전체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전체 인류와 만물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 개인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남 모르는 사정인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소망을 이루시고자 가인과 아벨을 세우셨으나 이것이 무너지니 1600년이란 세월을 거쳐서 겨우 노아 가정을 찾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남아져야 할 노아의 가정도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깨지고 아브라함, 모세를 거쳐 예수에게까지 연장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념을 개인에서부터 이루어야 할 것이었지만 이루지 못하여 독생자 예수에게까지 이 소망이 남아져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개인으로 오셨지만 평범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간 참고 또 참아오신 하나님의 인내심과 소망해오신 이념을 통하였고, 심정을 통하였던 분입니다. 그리고 4천년의 역사노정 가운데 왔다간 선지자들이 이루려다 이루지 못한 모든 소망까지도 일신에 짊어지고 4천년의 선의 결실체로서 개인을 거쳐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인 차원에서 천륜의 한을 풀어드려야 할 이념을 가지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지상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크나큰 이념을 갖고 오신 예수님을 예수 한분의 이념으로만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민족과 인류 개개인의 심정에까지 머물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 크나큰 하나님의 이념이 예수 한분에서 머무는 이념으로 끝을 맺었고, 또한 예수 한분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큰 이념은 땅의 이념으로 머물지 못하고 영계의 이념으로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영원히 지상에 남아져야 할 이념을 찾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고, 예수는 이 이념을 땅에 남기기 위하여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상의 인간들이 고대하는 이념, 땅에 영원히 남아지는 이념을 가진 개인, 가정, 민족, 인류는 어느 때 어느 곳에 나타날 것인고!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실 때에 그의 말씀과 소망은 남겨 놓고 가셨지만 그의 이념은 남기지 못하고 가셨으니, 그 이념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그의 이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그 사람은 먼저 예수의 소망과 뜻을 가져야 할 것이요, 소망과 뜻을 가진 그 위에 이념을 가질 수 있는 마음과 역사노정의 설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 지상에 와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 간절하게 바란 것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뜻을 깊이 깨달아서 이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는 가 하면 없었다는 것입니다. 3년간 따라다니면서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 중에서도 그의 말씀 그대로 다 실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는 부활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라고 세 번이나 거듭 물었으며, 베드로가 대답하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 올 터이니 준비하며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 가운데 중요한 말씀을 추려 본다면 이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4-255
예수님이 남기신 간곡한 부탁
그러면 예수가 남기신 간곡한 말씀은 누가 이룰 것인가? 이 남기신 말씀을 이루는 사람은 끝날의 심판을 피할 것이요,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생에 예수를 사랑해 보았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하는 정도가 부모나 처자나 세상의 그 누구보다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가 이 땅을 대하여 간곡히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안 사람이요, 하나님의 6천년 수고와 예수의 쓰린 심정을 알고 동정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적 가치를 대표한 분이요, 모순 상충이 하나도 없는 하늘의 창조의 법도권내에 있는 분입니다. 예수는 이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육신과 마음이 하나되어 그 자신도 비록 아담으로부터 4천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으되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4천년 전의 아담에게 하나님의 창조이념이 깃들어 있었음을 직감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있었던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어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지 못하였으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맺어주어야 할 사명이 예수님에게 있었고, 또한 인간과 만물 사이에 사랑을 맺어주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왔던 연고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자기를 세상의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세상의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 역사노정을 살펴보게 될 때, 우리는 죄악의 혈통을 물려받은 개체요, 창조의 이념을 갖고 있지 못한 자신이요,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신부의 입장에서 모시지 못한 개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하였으되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연고로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끝날에 세계적으로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해야 할 조건이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역사상에 없었던 사랑을 가지고 충신된 입장에서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 신랑 되시는 예수님 앞에 취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였다면 누구보다도 하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찾아오셨는 데, 내가 이런 하나님을 사랑으로 맞지 못한다면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념은 나로 인하여 중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를 맞이하여 여러분이 가정을 대해서 기도할 때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할 것이요, 나라를 대해서 기도할 때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인류에 대해서 기도할 때에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어떤 종교인들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예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런 기도나마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피조된 삼라만상이 인간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이런 간곡한 부탁, 즉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부탁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존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가 나타나기를 만물이 바라고 있는 데 이런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만물이 탄식하고 하늘이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4-257
하나님과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해야
그러면 그 탄식은 무슨 탄식인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인연을 맺어야 할 아담과 해와가 타락으로 인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의 이념과 사랑과 인연을 맺기를 고대하는 탄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탄식을 풀어주지 못하는 사람은 끝날의 심판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심판에서 남아질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는 하나님과 예수의 심정을 어느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또한 그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만 그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념에 통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원수를 이 천지간에서 몰아낼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어줄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그의 가슴속에서 언제나 강하게 용솟음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늠름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랑과 신부라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신랑과 신부는 무엇인가. 예수가 가신 후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사랑한 신부가 있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말을 하고 예수로 말미암은 역사를 이야기했으나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인류 앞에 나타내지 못한 예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심정을 체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정과 나의 심정이 하나되어야만,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이념을 땅 위에 남기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 이상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나 제자들은 자기들을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정과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제대로 받아 감당하지 못하고, 땅 위에 그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지 못한 것이 하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의 사랑의 심정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느꼈으며 그때부터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의 의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망하시며 찾으시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자신을 누구보다도 더 미워하고 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 다녔습니다. 고로 끝날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미워하고 버리면서라도 사랑의 마음을 갖고 하늘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주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역사노정에서 하늘이 겪은 슬픔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어려움의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섭리역사의 기간을 단축시키고 시공을 초월하여 2천년전 예수님이 품으셨던 쓰라린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가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 사람은 비록 인간들이 보기에는 미약한 존재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고을에서 쫓기고 저 고을에서 비난받고, 가는 곳곳에서 조소를 일신에 받고 다니던 총각 예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따르던 마리아였습니다. 이런 간곡한 마리아 앞에 예수는 부활의 몸으로써 나타났으니 이는 끝날에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갈길을 보여 준 표상인 것입니다.

그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생활을 했던가? 예수를 사랑하기에 입을 것 먹을 것 전부를 잊어버리고 일편단심 그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생사를 초월하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따르던 그녀의 행로는 끝날의 성도들이 걸어야 할 노정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이 땅 위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심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을진대는 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6천년 섭리에 어린 눈물이 감돌 것이요, 하늘 앞에 무한히 빚진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몸을 불사르더라도 받은 사랑에 대해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알 것이요, 죽음의 길로 가야 할 자신임을 알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여러분은 어느 한때라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창조시대부터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전체를 다 버리고 찾아주시는 하늘의 심정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늘 앞에 얼굴을 못들 것이니 그것은 하늘 앞에 무한히 빚진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정을 느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만을 따르는 사람이라야 끝날에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편안한 것을 바라는 사람은 예수의 심부름꾼은 될지언정 그의 친구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도 그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친구는 될지언정 그의 신부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바라고 예수가 바라는 것은 심부름꾼도 아니요 친구도 아니요 신부라는 것입니다.

4-259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서 역사상의 어느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인류를 사랑하고 창조의 이념을 통한 실체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하나님을 부르게 될 때,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다 잊으시고 예수를 붙들어 주시던 일순간의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창조주인 자신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까지 세워주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대하셨던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택한 민족 앞에 배척을 받고 몰리는 환경이었으나, 4천년간 하나님의 참으신 심정을 알았기 때문에 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4천년간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시면서 아들 하나를 찾고자 노력하신 것을 아는 예수는 땅에서 신부를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과 배척이 있어도 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처럼 대하는 민족을 저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그런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았던 막달라 마리아였지만 부활한 예수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지상에서 온전히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성신의 심정과 예수의 심정, 하나님의 원한의 심정은 풀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는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로서 나타난 한 존재를 찾아 그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있어야 하고 민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민족, 이런 인류는 천정을 중심삼고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이 이런 천정을 느낄 수 없는 한, 끝날에 남아질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역사적인 죄인임을 알고, 남을 욕하고 남을 비판하기 전에 나를 먼저 알고 기도할 줄 알아야겠으며, 민족과 인류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이념의 세계를 이루어야 할 인류를 대하면 인류는 무한히 환영할 것이요, 만물을 대하면 자신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버림받았던 것을 알고 위로하며 환영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이 하늘 앞에 나타날 때에 하늘은 그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요, 그의 수고를 위로하실 것이니, 이런 사람이라야 끝날에 남아질 사람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을 하늘과 예수와 만물은 바라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