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to 4-46: 하늘을 향하는 결심을 잃지 말자

하늘을 향하는 결심을 잃지 말자
1958.02.23 (일), 한국 전본부교회

4-25
하늘을 향하는 결심을 잃지 말자
창세기 19:18-29 고린도전서 9:23-27

[기 도]

아버님이 바라시는 승리의 한날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오늘 이 시간까지 아버님께서 피맺힌 싸움의 노정을 걸어오신 것을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나이다.

저희들은 진리로 무장하여 아버지의 뜻을 옹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선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워나가야 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몸이 동원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에 널려 있는 성도들과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동원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날을 찾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지치기도 하고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면서 사무치게 주의 때를 기다려 왔사오나,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서러움이 땅과 하늘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부족한 저희들, 보잘것없는 저희들, 무능력한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부르시어 소망하신 바 그 영광의 날을 찾기 위한 피맺힌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하시옵고, 뜻을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싸울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을 갖게 해주신 아버지의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을 다시 성별시켜서 저희들을 제물로 받으시옵고, 사탄의 참소조건을 완전히 분립시켜 아버님만이 취하시고 아버님만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원하는 뜻을 대하여 저희들이 마음과 몸으로 충성을 다하고, 저희의 마음으로 이 시간 새로운 은사를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몸과 마음에 넘쳐 흐르는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를 체휼하도록, 아버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같이하여 주셔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생활했던 내용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아버지 앞에 내놓고 부복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순된 인간의 모순된 지식이 아버지의 진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자인한다 할진대는 ,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내놓고, 스스로 아버지의 은사에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탄이 일체 틈타지 않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시고, 허락하신 은사를 대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4-26
말 씀
`하늘을 향하는 결심을 잃지 말자’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4-26
결심의 가치기준
오늘 모인 여러분 가운데는 마음속에 어떤 결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나의 결심이 옳다’고 주장하며 나설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결심이 누구를 위한 결심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결심이 자신만을 위한 결심인가, 여러분과 민족, 혹은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까지도 위할 수 있는 결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품은 결심이 하늘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여러분 앞에 당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결심은 천태만상입니다. 갑이 가진 결심과 을이 가진 결심이 다르고, 남자가 가진 결심과 여자가 가진 결심이 다릅니다. 또 이 민족과 저 민족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각기 다른 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각자가 주장하고 각자가 갖고 있는 결심이 최후에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가. 자신을 세워 놓고 냉철히 반문하게 될 때 자포자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끝날에 처한 오늘날 우리들, 또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심이 민족을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 나아가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라고 반문하게 될 때에 그렇지 못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나, 그러한 우리들에게 하늘의 바램이 있다 할진대는 ,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소망하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주의(主義)를 갖고 그것을 주장하여 왔으나 그들이 주장한 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요소를 갖지 못하고 있다 할진대는 그들의 주장, 즉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성현 선철들이 주장하여 왔던 주의는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무엇을 세우기 위하여 발전하여 왔던가. 이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혹은 인류의 영원한 이념을 세우기 위하여 발전해 나왔음을,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할진대는 부정못할 것입니다. 하늘이 있는 한 인간에게 행복의 동산이 어떻다는 것을 소개해야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희락의 동산을 건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오늘날 역사과정을 섭리하여 온 하나님이라 할진대 역사의 종말단계에 처해 있는 우리들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이 동하면 자신도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자신도 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음 바탕 위에 갖추지 못한 사람은 역사를 유린하는 자요, 하나님의 소망을 배반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4-28
하나님의 결심
온 우주의 운행의 법도는 천륜의 원칙을 따르게 되어 있고, 그 운행 속에 전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도 그 섭리의 운행 법도를 통하여야 되고, 또 인류도 그 운행법도를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 한 자신을 민족 앞에 세워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민족을 대하여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이 민족을 각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결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민족을 천륜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에 비통한 것이 있다면, 이 민족이 어차피 가야 할 길을 가기 위하여 하나의 이념을 중심하고 단결된 마음으로 투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천륜을 대하여 온 세계 인류가 단결된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하늘의 서러움이요, 인류의 서러움인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 가 하는 것을 냉철히 분석하고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여러분이 민족 앞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있고, 자신 있게 천륜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의 터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최대의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먼저는 이 땅에서 창조의 뜻을 성취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을 인간들이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결심한 바가 있었고 그 결심에 의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는 데, 그 결심이 아직까지 이 피조세계에서 실현되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은 슬픔의 역사를 거쳐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우리들이 우주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결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품으신 서러움과 슬픔을 풀어드려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뜻을 중심삼고 일대 혁명과정에 서야겠다는 결심과 주의 주장과 각오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당신이 결심하신 뜻을 이땅의 인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수고의 역사과정을 걸어 오셨으니 그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 결심을 인간을 대신한 구세주가 땅 위에 나타내어야 하고, 모든 악의 세력과 대항하고 그들을 격멸시켜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심과 인간의 소망의 기준이 어느 한날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그 뜻을 인간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중심존재로 보내진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모든 어려운 환경에서 싸움의 길을 걷게 하셨으니, 그런 길을 간 분이 바로 우리가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시조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못한 하나님의 창조의 결심을 복귀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속된 인간 세상에 제2 아담격 인물로 세우시어 하나님의 결심을 만우주 앞에 나타내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과 한몸’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야. 이것을 반대하고 막을지라도 내가 느끼고 결심하고 있는 이 내용들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자부심을 가지셨습니다. 즉, 예수는 생명의 손상을 각오하고 이것을 과감하게 공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심을 오늘날 믿고 있는 수많은 신자에게 나타내는 것이 예수님이 2천년 동안 수고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6천년간의 기나긴 세월을 쉬지 않고 수고해 오셨다는 것을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4-30
예수님의 결심과 성신의 역할
이제 여러분들이 하늘을 대하고 나섰다 할진대는 ,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결심하고 나섰던 그리스도의 성상을 여러분 자신의 성상으로 바꾸어 느낀 때가 있었는 가를 하늘은 반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0여 평생 동안 말로 다하기 힘든 고난의 삶을 사시다가 최후에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비운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졌던 중심만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결코 깨뜨릴 수 없는 확고한 것으로 간직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하늘 대한 결심을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속에까지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이 배반하더라도, 택한 민족이 배반하고 교회가 배반하더라도 그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가 지니신 결심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할 수 없는 입장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심의 주인공이 땅 위의 인간 앞에 무엇을 세워 주기 위하여 왔느냐. 그것은 자신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창세 전 결심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인계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과정에 나타난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예수가 가졌던 결심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싸운 사람이 몇명이나 되었는 가.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슬픔은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믿는 다는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대신한 확고한 결심이 없는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은 슬퍼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자신의 결심을 알아주는 하나의 상대자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결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을 통하여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하심으로써 통일의 불길을 붙일 수 있었을 것이었는 데, 그러한 결심의 소유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에게는 부활한 후에 이 땅 위에 왔던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결심의 주인공을 땅 위에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명을 인계시킨 한분을 보냈습니다. 그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인간 앞에 나타난 성신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결심과 예수의 결심은 누구에게서 열매맺을 것이냐? 하나님은 성신을 통하여 당신의 결심을 인간 앞에 재차 나타내게 됩니다. 이것을 뜻의 주인공 앞에 전하고, 그 주인공은 신부 앞에 전함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그 뜻의 주인공이 이 땅에 임재하여 하나의 가정으로 옮기고, 가정을 중심삼은 친족, 친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에까지 옮겨 놓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오늘날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신도들조차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성신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고 자신하여 나설 수 있습니까? 어떠한 고난과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또 어떠한 유혹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박차고 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결심과 예수와 성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결심을 가졌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나는 예수를 대신하는 심정과 결심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팔던 이스라엘민족보다도 더 엄한 심판을 피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한 민족이 있었기 때문에 성신을 수고시켰고, 성신의 뜻을 받들지 못한 제2의 이스라엘형인 오늘날의 기독신자들은 수많은 사도들을 수고시켰으며, 비단 사도뿐이 아니고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을 수고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고를 시키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지니셨던 심정과 결심을 소유하지 못한다 할진대는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워 설 수 없는 것이요, 예수와 성신 앞에서도 체면을 세워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수많은 희생의 제단을 쌓아놓은 성도들 앞에서도 체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책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개탄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4-32
하늘의 결심을 소유해야 할 성도들
하늘은 오늘날 끝날을 당하여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성신도 우리를 향하여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실체가 되고, 아버지의 결심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 이것을 유린하는 사탄을 박멸시킬 수 있는 승리의 주인공이 될 것을 하나님은 이 시간도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의 뼈와 살에 사무치게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지니신 결심을 저에게 상속해 주시옵소서, 피뿌리는 제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참아나왔던 사도의 결심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서 천당가겠다고 하니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는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습니다.

현하 기독교를 각성시켜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심과 예수님과 성신의 결심과 내가 연하여 하나의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할진대는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 읽은 성경말씀에는 소돔 고모라에 심판을 내려야 하는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성을 향하여 심판하려 하셨을 때에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으로 하여금 심판을 피하게 해주셨습니다. 롯이 잘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피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에 아무 수고한 공적이 없는 조카에게까지 심판을 피할 수 있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롯의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습니다.

롯과 그의 두 딸은 하나님께서 피하라는 곳으로 피하였으나 롯의 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늘 뜻에 대한 결심이나 뜻을 대한 염려 또는 하늘을 대한 두려움보다도 자기들이 살던 가정집과 그 환경을 그리워하여 돌아선 것이 소돔 고모라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있는 데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천륜의 뜻을 따라 어떠한 어려움도 각오하고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걸어야 할 운명길인 것입니다. 롯의 처도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나설 수 있는 결심이 서 있지 못하여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나선 자기의 남편을 하나님 대신자로 믿고 남편이 하라는 대로 하였던들 그녀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섭리역사를 경륜해 나오시는 과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심정을 대신한 사람을 세워 당신을 믿지 못하겠거든 그 사람의 말을 듣고서라도 결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타락한 종족인 연고로 겪는 서글픔이 있습니다. 크나큰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싶고, 나의 몸 마음을 제물삼아 새로운 결심을 하고 행동에 옮기고 싶은 마음은 암암리에 느끼고 있으되 그 결심을 단행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타락의 종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자신들을 창조해 놓고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과 자신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결합체라고 생각하면서 변치 않는 결심을 갖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여야 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실감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게 된 것은 해와가 아담과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또 아담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갈래갈래로 분립되었고, 자의자행. 자유자재의 환경에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게 되어 창조 이상의 동산을 망쳐버렸던 것입니다. 끝날에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결심을 세워 놓지 못하고 자유주의를 부르짖다가는 자유 진영도 깨어져 나갑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야 할 아담이 어느 누가 뜻을 어기도록 유혹하더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 뜻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세워 해와를 주관하고 천사를 주관할 수 있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타락한 해와가 아무리 자신을 농락하려 해도 아담이 그 유혹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아담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해와는 얼마든지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배반한 연고로 천륜과 멀어지게 되었고, 허락하신 말씀과 뜻을 자기의 마음에 하나의 중심으로 세우지 못한 연고로 아담은 아담대로, 해와는 해와대로, 천사장은 천사장대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종족이 된 우리는 오늘 믿었던 것을 내일 믿지 못하게 되고, 이 시대에 믿는 것을 다음 세기에 믿지 못하게 되고, 다음 세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다음 끝날에는 믿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4-34
하나님의 해원을 위한 결심의 주인공
그러면 하나님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슬픔이 무엇입니까? ‘내가 6천년 동안 모진 역경과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고하여 이렇게 너 하나를 찾아와서 이제야 너를 만났으니 안식할 수 있겠구나’ 하시면서 에덴 동산에서 천사장에게 말씀하시지 못했던 그 내용을 믿고 안심하는 자리에서 말씀해 주실 수 있고, 당신의 심경을 토로하실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찾고 있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못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가면 갈수록 마음의 조급함을 피할 수 없고, 아무리 잘났다고 뽐내고 있어도 끝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마음의 불안감을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시대에 엄습해 오는 이 공포와 불안을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인간을 대신하여 장담하고 나서지 않고 천륜을 대신하여 장담하고 나설 수 있는 결심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을 잃어버림으로써 아담과 통할 수 있는 창조 본연의 가정을 잃어버렸고, 동시에 아담과 통할 수 있는 친족과 아담의 혈족을 대신할 수 있는 민족과 아담을 중심삼은 국민과 아담을 중심삼은 천국백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 전체를 찾고 세계까지 찾기 위하여 먼저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 사회를 찾아세우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터로 하여 민족형에서 세계형까지, 나아가서 이 세계 전체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섭리를 해 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일면에서는 싸우시고, 또 어떤 곳에서는 희생당하시면서 역사 과정을 통해 이것을 찾아나오셨습니다. 그런 이면에 개인적인 형태를 갖추어 아담을 대신한 가정 , 친척·민족·국가·세계를 이 지상에 건설하여 나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잃어버린 이 하나의 사실이 아담 일신만의 서러움이 아니요, 아담의 혈통을 통하여 천추만대의 전인류에게까지 미치는 서러움임을 여러분은 생활권내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안일을 바라고 안락을 누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런 안일과 안락된 생활이 계속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포의 관문을 앞에 놓고 이것을 넘어가야 할 처지에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시기를 소위 ‘ 심판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공포를 없애 주기 위해서 택한 한사람을 세우신 후 그를 중심한 민족을 세우고, 그 민족을 다시 세계의 선두에 세우시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애달파하시면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하늘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민족은 큰 민족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민족도 아닙니다. 천국주권을 회복하여 제 2천국을 건설하여야 할 민족은 큰 민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난데없는 곳에서 은밀히 천국을 건설하는 작업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데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못 먹고 못 사는 이런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인류의 투쟁역사는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심정을 잃어버린 인간이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입장으로 복귀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그 고난이 일시에 나에게 부닥쳐 오더라도 이것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 앞에 굴하지 않는 결심의 주인공이 되어 하늘이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한 존재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4-36
하늘을 향한 결심을 품고 산 선조들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있는 세계적인 대표로 예수를 보내시었고, 그러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수많은 우리 선조들은 고생의 길을 갔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가정을 찾기 위하여 아담 대신 불신의 마음을 가졌던 그 종족과 민족을 박차고 하늘을 대하여 믿음의 결심을 가진 하나의 사람이 택함을 받았으니 그 사람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하늘이 끌고 끌고 또 끌고 다녀도 변치 않는 결심의 마음을 가졌었는 데 이것이 아담보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미성년일 때에 타락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연고로 하나님이 다시 믿으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아담 이상의 수고를 해야 되며 몇 백배 수고하는 경우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는 자기의 일신, 자기의 가족, 자기의 친척, 자기의 민족, 나아가서 자기와 인연된 어떠한 세계 만상이 반대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한 순간의 결심을 끝까지 지켜가면서 아버지를 붙들고 120년 생애기간 동안 싸워 나온 것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때의 인류 앞에 세워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홍수심판을 모면하여 하나님의 은사권내에 있던 노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니고 있던 그 노아의 마음을 인계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하고 그 애달프고 억울한 노정을 거쳐오면서 천륜을 염려하던 그 마음을 대신하여 노아의 손을 붙들고 ‘아버지, 무엇이든지 저에게 명령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120년 동안 수고하여 마련한 제단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성심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가진 노아인 것을 노아의 여덟식구가 알았다 할진대는 , 죽든지 살든지 노아 앞에 절대 복종하여 아버 지가 죽으면 자기도 죽고, 아버지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아하는 입장에 섰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다른 대수롭지 않은 내적 조건이 젖끄러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중심하여 심정을 결속하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형제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에 합당치 않다면 듣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가 들어야 할 말은 안 듣고 듣지 않아야 할 말은 들었기 때문에 노아의 120년 수고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갈대아 우르의 황막한 광야를 향하여 길을 떠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후 아브라함은 남 모르는 결심을 품고 정든 고향산천과 자기의 친족도 다 버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하나를 염려하던 그 마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온 정력을 다하여 제단을 지켰던들 여기에 실수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면서 자기가 어마어마한 입장에 있음을 알고 자기에게 있는 믿음의 전부와 있는 모든 정력을 다 기울여 하나님과 일체될 수 있는 결심을 가지고 나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작은 제물이로되 자기의 이념을 세워 전체의 천륜의 뜻을 대신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대해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던들, 거기서 실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물에 실수한 아브라함이 다시 하나님의 뜻을 인계받기 위해서 제물 대신 이삭헌제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과 하나될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노아의 마음과 하나될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과 자기 아들의 마음이 하나로 결실될 수 있는 입장을 찾아나서게 되었습니다.

4-38
배반당해도 변치 않은 결심의 가치
그리하여 이삭을 모리아산상의 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찌르려고 하는 마당에서 죽음의 제물을 대신할 수 있다는 하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삭도 아버지 앞에 복종하였고, 아브라함도 아버지 앞에 복종하여 그들은 천륜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이삭을 거쳐 야곱 때에 이르러서 야곱을 중심삼고 비로소 아담가정을 대신하고 노아가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삼대(三 代)의 친족형태를 갖춘 70인이 가나안땅을 떠나 애급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을 거쳐 손자까지 땅 위에 세 형태의 친족적인 형태를 갖춘 토대로 말미암아 그들은 사탄세계에 파송되어 애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개인으로부터 가정, 그리고 친족적인 환경을 세워 놓은 후에도 그들은 평안한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친족적인 70문도를 대신하는 그들은 또다시 민족을 조성하기 위한 민족적인 싸움을 전개하며 하나님을 중심한 민족을 형성해야 할 시련의 무대에 올라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궁중 4백년의 고역기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고역기간에 택한 이스라엘민족은, 옛날 자기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였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스라엘백성은 극심한 애급에서의 고역을 이겨내고 단결하여 60만을 몽땅 이끌고 가나안복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해야 했던 모세도 바로궁중에서 40년 동안 남이 모르는 심적인 고민을 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정신에 불타 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급사람을 때려 죽인 것이 드디어 광야에서 처량한 목자의 생활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모세는 애급 궁중의 호화로왔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도리어 미디안 땅에서의 고역생활이 닥친다 하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을 품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온갖 풍우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맛본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 밀어제치고, 민족으로부터 몰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모세의 변치 않는 결심이 있었던 연고로, 민족이 어려운 사정에 처하고 모세가 그런 고난의 환경에 들어갔을지라도 민족이 단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요, 하늘은 모세를 세워 섭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민족을 다시 택한 국가로 세우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시련 앞에 그민족을 몰아넣어 놓고 공격전을 전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한 방법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국가 건설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는 택한 이스라엘민족 앞에 반대받는 것입니다. 복귀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아담을 따라야 할 해와가 아담을 쳤고, 노아를 따라야 할 노아의 아들이 노아를 쳤고, 이스라엘민족 60만 대중이 모세를 따라야 할 것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쫓아냈습니다. 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왔던 연고로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오게 될 때에 택한 백성은 예수 앞에 신부격이었으나 오히려 이들이 예수를 반박하였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법도를 아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민족한테 몰렸고, 유대교단으로 부터 몰렸습니다. 자기의 종족 앞에 몰렸을뿐만 아니라, 하늘이 택한 세례 요한 일당한테 몰리고, 따르고 있던 사도들로부터 몰렸습니다. 하늘 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세 제자로부터 몰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을 붙들 어서 하늘 앞에 끌어 주어야 할 예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느냐. 아담이 예수와 같은 사정에 처해서 해와의 갖은 흉악한 궤휼과 유혹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를 꺾어야 할 입장에 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입장도 민족을 찾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민족 앞에서 몰리어 광야의 서글픈 생활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민족 앞에 몰리게 되면 세계 앞에도 몰려야 할 입장에 놓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이렇게 ‘민족이 배반하고 교단이 배반할지라도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일편단심을 어느 누가 빼앗아가랴. 내가 세운 결심 앞에는 하늘이 세웠던 세례요한이 배반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요, 나를 따르고 있는 제자가 배반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야. 더 나아가서는 내 몸뚱이가 문제가 안된다고 하는 이런 결심이 있었기에 서글픈 일이 있어도 서글퍼할 수 없었고 슬픔의 자리에서도 슬픔의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복귀의 운명을 책임졌던 예수의 심정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대한 하나의 결심을 갖고 재물됨을 만 우주 앞에 내세워 인간이 반박해도 깨지지 않고,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와 오늘날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 총동원하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이런 결심이 있었기에 여기에서부터 역사적인 전환점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4-40
결심의 상속
이리하여 영·육 아울러 실체적인 승리의 터전이 세계적으로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중심으로 제 2의 결심을 제자들에게 부여 하여 영적 가나안복귀이념을 세워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계 인류를 위해서 이 땅에 찾아 왔습니다. 세계의 사람들은 예수 앞에서는 아들의 입장 즉,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해와가 아담을 유린하고,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쫓아내고, 제물이 아브라함을 참소하고, 노아의 아들이 노아를 쫓아내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기독교는 가는 곳곳마다 세계도처에서 몰림받는 처참한 노정을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의 축복이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성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2이스라엘로 택한 기독교인을 세워서 이 원한을 풀고 하늘과 땅을 복귀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주복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의 중심인물, 하나의 중심민족, 하나의 중심국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6천년 동안 수고하면서 뜻을 대하여 나왔지만 예수가 죽은 연고로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실패한 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분의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섭리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낙원에 있는 영인들은 잃어버린 제 1이스라엘을 회복하려 하셨던 예수님의 뜻을 위한 발판을 닦고, 더욱 회복의 뜻을 영적으로 성취한 형의 영인들인 것입니다. 택한 이스라엘민족이 원래 제1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 데 제1이스라엘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제2이스라엘형이 영적 복귀의 과정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림으로 맺혀진 하나님의 원한은 오늘날 제2이스라엘형에 속한 영계의 영인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풀어지는 것입니다. 제 1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이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게 맺혀진 원한의 심정을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2이스라엘을 동원하고 영계의 영인들을 동원하여 제2이스라엘 회복운동에 박차를 가하려는 때가 끝날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시대에 처하여 있는 가. 모세의 광야 40년 노정에 맞먹는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석판을 받기 위해 기도하던 기간에 맞먹으며, 예수가 승천한 이후 2천년의 역사과정은 모세의 40일 금식기간에 맞먹고 40년 광야 기간에 맞먹는 것입니다. 또 모세가 없어진 것을 보고 이스라엘민족이 안타까와하는 형상에 맞먹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는 다시 나타나는 모세를 맞아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광야의 이스라엘민족은 옛날 구약말씀, 모세 십계명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는 데 받아들이지 못하여 환희의 심정을 갖지 못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는 민족이 모세의 배반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하늘이 원하는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제3이스라엘의 자리를 찾아 승리하여 세계 가나안복귀의 이념을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일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모세의 결심이 60만 대중의 결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이 민족과 혹은 세계인류와 크리스찬들은 예수의 결심을 인계받지 못했으니, 모세 때 광야에서 사탄이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을 농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도 그런 시대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오늘날 내 몸에 피살이 뛰고 있고 내 마음에 무엇인가를 느끼는 여러분이라 할진대는 , 여러분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만나기 전까지는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려야 할 것이었는 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모세를 잃어버렸고 모든 뜻이 깨어져 나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이후 2천년간은 광야시대 입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기독교 신자들은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억울함도 분함도 참고 참아 이를 악물고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일찌기 모세의 발자취를 사수하지 못한 것을 반대로 탕감복귀하여 우리는 예수의 발자취를 사수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런 사명이 지워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4-42
끝날의 현상과 성도들이 품어야 할 각오
이제 때가 가까와 오니 이 때를 준비하여야 할 과정에 있어서 택한 민족을 이방나라에 넘겨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민족이 메시아강림 준비시대를 맞기 위해서 예수님 오시기 6세기 전에 준비하는 기간으로 바빌로니아 포로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강림 6세기 전부터 문예부흥운동을 중심삼아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세계적인 공세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싸움의 노정을 오늘날 세계 기독교 신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막아내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각성을 해야 합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시대에 있어서 문예부흥운동이 유발된 것은, 사람들이 옛날 희랍의 고대문명을 연구하고 새로운 복귀이념을 갖추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혁신적인 문화의 일면을 일으켜 놓았던 것처럼 오늘날 끝날을 맞이한 성도들도 역사를 회고하여 2천년 전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타락 전 아담 해와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마음을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뜻을 대하기 직전의 아담 해와에게 천사장의 공격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에게도, 모세에게도, 예수에게도, 뜻이 나타나야 할 끝날 성도들에게도 이런 공격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공격입니다. 먼저는 물질적인 공격이 있게 되고 그 다음에는 정적인 공격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상이 오늘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역사가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을 통해서 진전될 때 그 노정은 공식적인 원리원칙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기독교를 외적으로 반박하는 이런 시대가 됐습니다. 이 시대에는 옛날 이스라엘민족을 반대하던 애급민족형이 나타나고, 제2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게 될 때 민족이 단결하여 그를 몰아내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시대의 신앙자들은 전부 다 어떻게 될 것이뇨? 우리의 주위에서는 애급땅에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애급고역시대를 방불하는 상태 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모든 면에서 침범당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때 택한 선민의 지조를 갖고서 자기들끼리 붙안고 외부로부터 오는 서글픔을 밀어내기 위한 이스라엘의 단결운동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운동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파에 의존하는 자나 자기교회의 연륜을 자랑하는 자는 가룟 유다의 일파가 될 것입니다. 모세의 명에 따라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온 12지파 중에서 여호수아·갈렙을 반대한 10지파가 나왔던 것처럼 오늘날 그와 같은 형태가 벌어지지 않는 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이러한 때가 우리의 목전에 당도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나서야 합니다. 또, 소돔·고모라가 받은것과 같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롯의 가정이 걸은 발자취를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섰듯이 우리의 발걸음도 야곱과 같은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민족이 애급땅을 떠날 때 모든 미련을 박차고 나섰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오, 예수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홀로 넘어간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런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각오와 결심을 모든 만물만상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습니까. 하늘은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신교가 구교에게 몰림을 받던 과정은 불쌍한 모세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4-42
기독교인들의 사명
이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개척해야 할 새로운 사명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로서 만족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의 생활에서 모세의 신변을 보호해 주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교의 출현 때도 그러했습니다. 신교가 나왔으나 광야생활의 형태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 모세의 사정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끝날에도 그러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뜻이 진전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와 예수는 인간적으로 보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예수를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피살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모세와 예수가 몸 둘 곳을 모르고 허덕이며 걷던 걸음을 생각하는 일조차 없다 할진대는 , 모세의 40일 시내산 금식기도 때 흘린 애달픈 서러움의 눈물을 팔아먹은 천륜의 배역자와 같은 것이요,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민족과 같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서글픈 심정을 우리들이 체휼하여 제1이스라엘과 제2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과 발걸음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들을 세워 놓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주적인 이념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영계의 영인들이여 ! 내가 그대들의 소원을 풀어 주겠다. 지상에 있는 만 인간들이여 ! 그대들의 제물이 되겠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들이여 ! 그대들을 포로로 하여서 하늘의 심판대에 끌고 올라가 참소하겠다’라는 결심을 갖고 시대가 변하든, 세계가 변하든, 사람의 주의 주장이 모두 변하든 나는 변할 수 없다고 했던 예수님의 절개와 충절을 오늘날 여러분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성을 넘고 생애의 이념을 넘어서 천륜의 이념에 통할 수 있는 심적인 각오와 결심의 터가 되어 있지 않는 다 할진대는 , 하나님 앞에 무조건 순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올라가는 모세 앞에 이스라엘민족이 무조건 순복하였던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에도 그러했을 것이고, 오늘날 끝날에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앞길에는 생애 전체의 가치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죽어서까지라도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책임지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하늘을 대신하여 나서주기를 아버지도 바라고, 예수와 성신도 바라고, 우리의 선조들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골수에 사무치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앞에 놓고 우리 자신들을 돌이켜 보면, 나를 중심삼은 내 몸뚱이가 원수요 나를 중심삼은 내 가정이 원수입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는 가정이 원수였고, 야곱의 가정에 있어서는 종족이 원수였으며, 그 다음 국가 형태에 있어서는 세계가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노정을 걸어오셨고, 지금도 수많은 고비고비를 돌고 돌면서, 어떤 중심인물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을 세워서라도 또 거듭해야 하는 사정에 처해 있는 데, 여러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개인의 힘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에 분산되어서 하나의 민족형태를 찾아세우는 포위작전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에서부터 가정과 종족과 민족을 찾아세워 하나님을 중심한 국가 형태를 갖추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12지파를 재창건하여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널려 있던 이스라엘민족에 반열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기독교인들이 반열을 편성하여 사탄에 대한 공격전을 전개해야 할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는 크리스찬들은 광야의 이스라엘민족이 모세가 인도하는 방향을 알지 못하던 것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46
단결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때
이제 우리들은 손에 손을 붙들고 가야 할 공동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12사도 가운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12사도를 깨뜨려 버리고 예수를 죽였던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이게 될 수도 있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교회 식구들은 모두가 그대의 결심이 내 결심이요,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하면서 뜻을 위해 하나될 수 있는 반열적인 형태를 갖추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7족을 무찔러야 할 우리의 싸움의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들은 역사적인 사명을 지니고 이것을 탕감복귀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제단에서는 하나님이 ‘바쳐라’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받으시옵소서’할 수 있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결심이 내적 외적인 결심의 실체로 나타나서 이 결심을 중심삼고 가정과 겨루어 그 가정을 복귀하여야 되며, 교회를 각성시키고 국가, 민족을 각성시켜 복귀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당에서 내가 살고 있는 가정, 사회, 국가, 교회가 그리고 내가 바라보고 소망하고 있는 이 세계가 우리를 원수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을 이겼다고해서 즐거워하지 마십시오. 그후 광야시대에 여러가지 어려움에 휩쓸리게 되고 공격전이 벌어지게 될 때, 그 싸움터에서 여러분이 쓰러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운세는 한번 맞고 넘어가야 할에 있는 연고로 세계적인 복귀과정에서 기독교를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때리고 내적으로 때리는 이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제2이스라엘을 동원하는 시대가 오기 때문에 영계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계가 동원하여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을 세계적으로 널려 놓고 제 3이스라엘민족을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허덕이면서 남이 모르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치도 못한 생명의 양식을 먹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런 시대에 하늘이 내려주는 만나 양식과 메추라기 양식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메마르는 때가 오기 때문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찾아 헤맬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복귀동산을 건설하여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천신만고 내 몸이 찢기고 내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천륜의 이 한 뜻을 위하여, ‘아버지여 !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여! 역사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영계를 동원하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영계를 동원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영계의 협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식구들은 영계의 영인들을 부르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령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한 자체를 세워 내 가정과 내 민족과 세계를 동원해야 하는 사명, 또 사탄을 아버지 앞에 굴복시켜야 할 최후의 사명이 우리에게 짊어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내 한 개체에 대한 시험, 가정에 대한 시험, 교회에 대한 시험, 사회에 대한 시험을 이겼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천적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갈렙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듯이 이제 우리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손에 손을 붙들고 마음에 마음을 합하여 사탄과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명심하고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