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9 to 4-233: 야외예배에서

야외예배에서
1958.05.11 (일), 한국 삼청공원

4-229
야외예배에서
마태복음 17:1-18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심정을 부둥켜 안고 이스라엘민족과 영계의 영인들을 대신하여 안타까움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때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한 사람은 많았으나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그 당시의 유대교단과 유대민족이 바라는 소망은 컸었으나 그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먼 거리에 있었고,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흉금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는 동지와 제자들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229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셨던 주님
그래서 남 모르게 겟세마네동산이나 감람산이나 변화산상과 같은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산상에 올라, 이스라엘나라와 이스라엘민족을 바라보시며 느끼신 슬픔과 염려의 마음을 같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간 것은 영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담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멀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을 놓고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제자들은 택한 이스라엘민족이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한없이 슬픈 자리에 계시리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황홀한 영광에 취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이만한 환경을 가지게 된 것도 하늘이 이런 환경을 이루기 위하여 수천년 동안 수고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적인 환경권내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하늘과 먼 거리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좋은 환경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그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나타날 때까지에는 하나님의 염려와 수고의 심정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도된 사람이 진정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변화산상에서 벌어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주적인 담판의 기로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무친 서글픈 심정입니다. 우리들은 외적 환경에서 기뻐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 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적인 판도에서 하늘의 선봉자로서 사탄과 싸워야 할 하늘의 정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가졌던 그 결심과 각오를 우리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세 제자는 몰랐으나 엘리야와 모세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결심하게 될 때 하늘에서 `이는 나의 아들(눅 9:35)’이라는 음성이 들렸고, 하늘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할 때에 예수님은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세 제자가 예수의 심정과 하늘의 내적 심정을 느꼈던들, 골고다의 길을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상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같은 그런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과 생활을 계승하는 후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결심을 다시 가져야 할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자기를 나타내기 쉬우나 예수님은 기쁨이나 슬픔을 자기를 중심하여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늘로 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사셨으며, 역대의 선조들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하늘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되 자기 일신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하늘을 더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중심삼고 영광을 취하려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리에서는 하늘과 분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4-231
예수의 심정을 몰랐던 제자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는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사건과 장면은 하나님 또는 인간의 어느누구도 모르는 비장한 장면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자기를 중심하고 헤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변화산상의 세 제자들은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눅 9:33)”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영원히 머물자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제자는 나타나는 환경에서 즐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심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나타난 변화산상의 환경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그 환경을 대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역사적인 내적 서러움과 미래의 서러움에 사무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예수님이 이런 서러움의 심정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거의 역사적인 서러움에 젖어 있는 배후관계의 모든 것을 넘어 최후에는 예수를 다리 놓아 하나님을 붙들고 담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슬퍼하는 이 민족의 배후에는 민족을 대신하여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 정성들이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교단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제사장과 같은 직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21년간 남 모르는 기도를 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브라함에서부터 3대에까지 연결지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을 위한 탕감의 노정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모세도 역시 민족을 위해서 바로 궁중에서의 40년 생활과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간의 기도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민족을 대한 슬픈 기도를 하는 교단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들에겐 이미 제사장적 직분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여러분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 앞에 담판의 기도를 해 본일이 있는 가 하고 물을 때,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라도 그런 결심을 갖고 끝날을 책임질 수 있는 역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자리가 그런 환경이 못 되었다 할지라도 머무는 환경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지역 지역을 책임진 변화산상의 예수와 같은 성도들이 많이 나와야 그리스도의 해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옛날의 세 제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때와 지금과는 시대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으나 예수님의 심정과 직접적인 인연을 갖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후신자가 되어야 통분한 예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변화산상의 영광을 그 사람에게 인계시킬 것입니다.

사탄 대한 하늘의 정병으로 내세워 가지고 민족과 교단과 종족을 대신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어 그런 사람으로 구성된 민족 국가가 되어야 하나님의 한 뜻이 실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이런 모임이 우연한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선지선열들이 역사과정에서 수고한 공로의 제단 위에 나타난 우리인 것을 알고, 마음을 가지되 예수님 이상의 마음과 세 제자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를 하늘은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몰리고 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개인의 구원보다 민족과 세계를 위하는 투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인 이곳을 세제자와 영계의 영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결심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인물에게 하늘 땅의 뜻이 계승될 것이고 이런 인물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앞에 변할 수 없는 중심 기준을 세운 연고로 하늘도 예수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4-233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
오늘날 내 한 자체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 하나가 잘못하면 후대의 천추만대에 원한의 흔적이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두고 또 미래의 영원한 시간까지 변치 않는 중심 기준을 소유한 자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뜻을 계승하여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증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리의 인연을 맺고 나온 것을 어떤 시대나 어떤 환경에서도 입증시켜 드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몸과 발이 민족과 세계를 대신하여 움직여 본 일이 있습니까? 광야에서 헤매는 이스라엘민족같은 세계 기독교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심정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될 것이며, 하늘은 안팎의 양면을 보시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슬픔과 역경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미래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생사의 결정을 지어야 할 때 도망가버린 그런 제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변화산상의 권고가 있다면 그것을 생명의 도화선으로 하여 무한한 세계의 뜻을 생활적인 면에서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책임질 역사적인 선봉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의 심정이 여기에 나타났다면 혁명의 불길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즉 하늘적인 심정을 생활권내에서 세워 놓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를 하되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무한한 심정과 서러움과 무한한 고충과 그 소망을 느낄때에 여러분은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경륜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늠름히 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의 슬픔과 애달픔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또 그 때문에 민족과 전인류와 사탄까지라도 위해서 복을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었으나 오직 예수 한분만이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이념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모든 죄악성을 오늘날 우리들이 탕감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숨은 내적인 심정을 알게 되면 한 달, 혹은 일년 내내 울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민족 앞에 판가리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민족을 대표하여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사명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무한한 세계와 인연을 맺을 때에 예수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피조만물도 우리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지으시며 기뻐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내리신 축복을 여러분이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변화산상에서 고민하셨던 예수님의 친구, 골고다에서 고난받으셨던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