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8 to 3-294: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우리는 넘자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우리는 넘자
1958.01.19 (일), 한국 전본부교회

3-278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우리는 넘자
마태복음 23:27-39

[기 도]

아버지의 존전에 나올 때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세상을 위해 수고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수고와 아버지의 슬픔과 아버지의 곤고의 노정을 헤아릴 때에 저희의 마음이 슬픔을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곤고함을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오며,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줄 알고 있사오니, 사랑의 아버님, 이 시간 하늘의 생명을 지닐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살아서 하늘을 찾기 위하여 모인 아들 딸이오니, 자신들의 모든 죄악상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6000년 동안 싸우시면서 피의 제단을 쌓아오신 복귀의 은사를 바라보고 부복한 모습들이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오며, 아버지의 것으로서 이 시간 전부를 바쳐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개개인의 심중을 아버지께서 통찰하시어서 자기의 마음의 중심에 사무쳐 있는 요구의 목표와 소망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더듬어 살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중심삼은 그 무엇이 있사올진대 섭리의 뜻 앞에 하늘의 중심을 찾아 세우지 못한 자신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자기 스스로 헤아려 하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로지 죄인임을 자인하면서 스스로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모든 것을 직고하고 아버지 앞에 눈물의 회개를 할 수 있는 간절한 흠모의 심정만이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의 마음 몸에 넘쳐 흐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마음을 중심하여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시길, 나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아버지의 무릎 앞에 엎드렸사오나, 이들이 아버지의 무릎 앞에 엎드려 호소하는 모든 조건들이 다 충성의 조건이 아닌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있는 마음문을 다 열어놓고 하늘 뜻에 잠기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잠기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소망하시는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들이 개개인의 모습으로 모였을지라도 모인 전체는 아버지의 무릎 앞에 하나의 산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저희의 원수요 역사적인 원수인 사탄이 저희들을 시기하여 방해할지라도 아버지의 자녀가 되겠다는 간절한 심정만을 지닐 수 있게 보호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었사오니 이 민족 위에 아버지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갈길을 알지 못하는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나선 저희들 위에 채찍을 내려 주시어서 끝날 마지막 복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늘 뜻을 이루는 중심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모든 것을 맡아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것으로서 바쳐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지방에도 외로이 아버지께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머무는 곳곳마다 일률적인 은사로 역사하여 주시옵고, 크신 축복을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3-280
말 씀
여러분과 잠시 생각해 보려는 말씀의 제목은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우리는 넘자’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3-280
넘어가야 할 비운의 운명길
오늘날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 앞에는 아니 넘을래야 아니 넘을 수 없는 비운의 운명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상으로 보더라도 끝날에는 심판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신자들은 어떻게 이 죽음의 고개를 넘을 것인가 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음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자신들을 헤아려 보게 될 때, 자기도 모르는 슬픔의 운명 가운데 처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심각한 문제가 자신의 앞길에, 혹은 주위에, 혹은 마음과 몸에 걸려 있다는 것을 느낄것입니다.

이런 비운의 환경을 박차고 나서야 할 사명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고, 이것이 남은 생애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슬픔의 환경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그 한날이 여러분 앞에 있어야만 여러분은 지난날의 비운의 역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것이요, 이것을 밟고 올라서야만이 새로운 한날의 소망의 동산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처해 있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회고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이 지금 맞고 있는 이 비운의 고개나 환경이 비단 여러분만 맞이하는 비운의 환경이 아닙니다. 60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 오면서 우리의 선조들도 역시 비운의 노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서 여러분은 선조들이 비운의 입장을 피치 못했던 동시에 인간과 창조주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비운의 입장을 피치 못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삼고 역사성을 대신하여 혹은 창조이념을 대신하여 이런 절박한 심정을 느끼는 동시에 어느 한날 역사를 대신하여 승리하였다는 기쁨의 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인간사회에 있어서 행복이나 소망이나 이념이 다 두절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쳐 온 인간이었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과 생활에 드리워져 있는 비운의 장막, 역사를 통하여 흘러온 비운의 장막을 어떻게 헤쳐낼 것인가 하는 책임을 느껴 오셨다는 것입니다. 도를 찾아 나온 도인들도 인간들을 위해 이 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감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수많은 종교가 미해결의 과제를 남겼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명을 남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남아 있는 이런 비운의 장벽을 헤치기 위해 하늘이 동원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이 비운의 운명을 타개하기 위해 하늘이 동원되어 있는 동시에 저나라의 영계가 동원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지상의 인간들도 동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운의 장벽을 밟고 올라서기 위한 역사적인 한 때를 찾아야 할 인간들이 그때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다시 그 비운의 역사를 인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단결하여서 이 모든 비운의 장벽을 밟고 올라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밟고 올라서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후손들도 역시 비운의 장벽을 넘어야 하고, 선조들이 걸어나오던 죽음의 길과 서러움의 길과 눈물의 길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여러분 자신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는 천상의 애원이 걸려 있고, 인류의 애원이 사무쳐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애원 전체를 해결해야 할 장본인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날의 생활로, 혹은 일대의 생애로 이 모든 비운의 장벽을 개척하고 넘어가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을 바라보고 오던 역사적인 소망 혹은 섭리적인 소망, 혹은 천적인 소망, 여러분 한 사람을 바라보며 비운의 장벽을 넘으려던 영계의 소망이 허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여러분은 개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있지만 과연 하나님의 비운과 천사의 비운과 미래 인류의 비운의 심정까지 대신하여 우리를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탄과 악의 무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책임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입장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대해 나오던 수많은 선지 선열들도 같은 처지와 같은 환경에서 자기의 생애를 포기하면서도 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3-282
노아의 비참한 운명
여러분이 다시 구약시대를 회고하면서 노아를 보십시오. 노아는 하나님께서 인간 조상이 비참한 운명을 남긴 이후 1600년 동안 수고하여 수많은 사람 가운데 비로소 찾아진 한사람이었습니다. 이 노아는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그는 당시의 수많은 인류를 대표하여 하늘의 비운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할 존재였었고, 당시의 인간들이 느끼는 비운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할 입장에 섰던 노아였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었던 노아, 1600년의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노아는 인간을 위해서나 하늘을 위해서 이 비운의 장벽을 헤치려고 역사 이래 어느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비운의 자리, 밟히고, 조롱받고, 몰리고, 쫓기는 억울한 자리에서 싸워나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의 생애를 여러분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의 생활 앞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가? 탕감의 원칙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복귀섭리인지라 노아의 앞에 1600년을 거쳐 바라던 서글픔의 비운의 사정을 대신한 방주가 나타난 것입니다. 노아가 대해야 했던 방주는 역사적인 비운을 대신한 하나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1600년의 비운의 고개를 넘어야 할 사명을 느꼈기 때문에, 책임을 맡기신 하나님과 이 책임을 짊어진 노아가 하나의 심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탕감조건으로서 맡겨 주신 방주라는 것을 노아는 알았기 때문에 120년 동안 모진 비운의 생활과 형극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120년 후에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받은 노아는 그 날부터 있는 정성을 다해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년도 아니요, 120년 이라는 기나긴 기간을 참으며 배를 지었는데, 배를 지은 노아의 심정은 자기의 가정을 위해서 짓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후손을 위해 짓는다는 심정도 아니었습니다. 또, 그 당시의 악한 세상을 위해 짓는다는 심정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이 방주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나를 성취하기 위해서 짓는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슬픔과 1600년 동안 거쳐나온 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슬픔을 품고 묵묵히 싸워나온 노아의 모습을 여러분은 회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온 선조들이 슬픈 길을 갔었지만 이런 환경에 처해 있었던 노아는 슬프고 어려운 환경이 몰려오면 몰려올수록 이 어려운 환경을 밀어내고, 밟고 올라서기 위하여 내적으로 몸과 마음의 무한한 투쟁을 거쳤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싸우기를 120년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어느 한 사람 동정해주지 않는 가운데 노아는 하나님의 뜻 하나를 세우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절개를 지켜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노아의 심정은 그야말로 1600년 이후 어떤 선조들이 느끼지 못한 슬픔의 심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하늘이 알아주게 되었기 때문에,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한날, 비운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심판의 역사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이처럼 크나큰 섭리의 사명을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그는 안일하게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기쁘고 평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몸이 고통을 당했고, 마음의 고통을 당했으며, 죄악의 환경으로부터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어느누구 한 사람 편들어주지 않는 어려운 고개를 다 넘고난 후에 하늘이 편들어 줄 수 있었으며, 120년의 핍박과 서러움과 말할 수 없는 비운의 운명을 견디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친구로서 노아의 위로자로서 노아의 비운의 해원해 주는 책임자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약속의 성취될 때까지의 과정에서는 내적 생활이나 외적 생활이든지 몸둘래야 몸둘 수 없는 이런 비운의 환경에 몸부림 치면서 무자비한 투쟁을 해야 했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됩니다. 내적인 비운의 장벽이 있는가 하면 외적인 비운의 장벽도 있다는 것을 노아 자신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외적인 방주를 지음으로써 다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주를 짓고 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행사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복귀된 동산에 새로운 가정을 건설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방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외적인 비운의 고개를 넘고난 후에는 내적인 비운의 고개를 남아 있었다는 것을 노아 자신은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그날의 실수로 인해 노아가정은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3-284
전체의 비운을 책임져야 했던 아브라함과 모세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의 뜻을 인계받아 400년 후에 믿음의 조상으로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도 하늘 땅의 비운의 장벽을 홀로 넘어야 할 사명을 짊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역시 노아가 걸어간 길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정들었던 고향 산천을 다 버리고 나선 이후부터, 즉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선 이후부터는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비운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후, 혹은 애급을 거쳐 가나안땅으로 돌아온 이후, 롯을 찾아가 만물복귀의 조건을 찾아 세운 그때까지의 생활이라는 것을 그때까지 하늘을 찾아 나가던 인간들이 느끼지 못했던 슬픔의 심정을 홀로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친척도 없었습니다. 동지도 없었습니다.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체의 복귀의 역사를 책임져야 할 입장에서 인류의 전체적인 비운의 심정을 아브라함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비운의 고개가 닥칠지라도, 어떤 고난이 닥칠지라도, 어떤 슬픔이 올지라도,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를지라도 남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품고 모든 것을 이겨 나가던 아브라함의 비운의 생애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제단을 꾸며 놓고 3대제물을 드릴 때까지의 수고는 컸지만 제물을 중심삼은 내적 서러움이 아브라함에게 부딪칠 줄은 아브라함 자신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을 다시 회고해봐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적인 비운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기가 지금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역사적인 사명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시대적인 사명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으며, 또는 미래 후손들의 사명과 천상의 사명까지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외적인 비운의 고개를 넘음으로써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당대의 비운은 물론 미래의 비운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영원한 인류 역사에 하나의 복귀의 기준점을 세워야 할 아브라함이었는데, 그만 그 일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내적인 비운의 생활을 밟고 올라가 이삭을 헌제하는 자리까지 나갔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내적인 비운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역사적인 비운을 책임졌던 아브라함이 불쌍한 자리에 처해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때까지의 인간들이 느끼지 못하던 비운의 심정을 품고 하나님 앞에 책임을 감당하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하고 맹세하였던가. 그는 자나 깨나, 눈이 떠져있는 어느 한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자기가 제물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대해 슬퍼했고, 하늘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비운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을 두고 볼 때에도 아브라함의 터전을 계승하여 하늘의 축복을 이루어 드려야 할 사명을 받은 그 날부터 야곱은 비운의 생활을 했습니다. 하란에 있는 라반의 집에서 21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비운의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에서를 굴복시키는 생활을 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가는 길에는 늘 하나의 슬픈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286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이 비운을 넘지 못한 이유
모세가 걸어간 길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400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사명을 진 모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대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 바로궁중생활 40년이나, 뜻을 실천하는 단계에 처하여 있던 미디안광야 생활 40년이나, 애급에서 60만 대중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하던 광야노정 40년 기간은 모두 말할 수 없는 비운의 기간이었습니다.

또, 홀로 민족이 모르는 비운의 심정을 품고,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하늘 앞에 담판짓는 일도 있었습니다. 60만 대중을 광야에 내버려 두고 홀로 하나님의 뜻 하나를 위하여 자기의 80여 생애의 모든 것도 잊어버리고, 그때 당하고 있던 슬픔의 환경도 잊어버리고 시내산으로 향하던 모세의 슬픈 심정을 여러분은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제물의 시간으로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잊어버리면서 몸 마음 다 내어놓고 몸부림치며 하늘 앞에 호소하고 간청하던 모세의 비장한 심정을 안 사람이 이스라엘민족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헤아려 보게 될 때, 노아로부터 지금까지 복귀의 사명을 짊어지고 나온 우리의 믿음을 지녔던 조상들이 슬픔의 생활과 비운의 생애노정을 호소하는 그들의 심정을 아무도 느끼지 못했고, 어느누구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상에 있는 선지선열들은 자기들이 하늘을 대신하여 싸우다가 남긴 비운과 원한을 누가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비운의 운명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들이 여러분을 참소할 것입니다.

민족 전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복지에 들어가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했고, 광야에 주저앉으려고 했습니다. 이럴 때 모세가 한 생명을 들어 전민족의 생명을 구원하는 산 제물로 삼으려고 몸부림친 것을 그 민족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친구가 되어 주셨고, 하나님만이 아버지로서 그를 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40일간 먹을 것을 잊어버리면서도 다시는 아버지께서 슬픔과 비운의 심정을 갖지 않게 해 드리겠다는 책임감을 느껴, 있는 정성을 다해 호소함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말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남모르는 가운데 배후에서 슬픔의 제물이 된 자가 있었다는 것을 이스라엘민족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것을 알았던들 광야에서 60만 대중이 쓰러지는 일은 면했을 것입니다. 그후에라도 그들이 모세의 십계명을 받들고 하늘의 서러운 심정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자기들의 몸은 제물될지라도 굽히지 않고 나가겠다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도 외적인 석판은 받았지만 자기 일신을 통하여 후손들의 내적인 비운까지 해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신에 나타나는 생활적인 환경이 비운적인 것이었지만 자기를 통하여 후손들의 내적인 비운까지 감당해야 된다는 책임은 모세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반석 2타로 말미암아 바로 궁중으로부터 하나님의 협조에 의해 인도해 나왔던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쓰러진 또 하나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세의 심정을 몰라준 것입니다. 모세의 절개를 그들이 인계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옛날 노아가 방주를 짓던 자리요,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던 자리요, 야곱이 21년 동안 양치던 자리이며, 모세가 120년간 수고하던 자리요, 40일 금식하던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288
비운을 당하신 예수님의 자세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의 동산을 약속받고 환희의 영광을 돌리면서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서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심정을 망각하고 나서게 될 때, 그 기쁨은 간 데 없고 원수를 향한 적개심이 변하여 민족을 향한 적개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늘은 그들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신도들이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역사를 농락하고 우리의 갈길을 농락하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워야 되겠다는 마음, 사탄을 향한 적개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자기편끼리의 원망이나 적개심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나 교단이 있다면 틀림없이 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민족이 이런 자리에 설까 염려하면서 기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민족과 세계를 지도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는 때가 되고 환경이 허락하면 민족의 수많은 원수들을 일시에 전멸시킬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자신을 중심삼고 움직여 나가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망하지만, 민족의 원수를 대해 싸워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몸 마음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처하여 있는 여러분 자신들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가. 여러분이 모든 선조들을 대신하여 나섰다 할진대는,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과 모세, 예수님 등 모든 선조들이 원수들과 싸우며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야 하고, 고생하며 사명을 감당하여 왔던 것을 여러분이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여러분을 앞질러 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모세도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늘 앞에 호소하던 엘리야의 외로움을 느끼며 싸워 나갔지만 이스라엘민족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민족의 원수를 갚게 되는 한날을 고대하던 간절한 심정이 그의 마음 몸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지고 또 쓰러질지라도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사명을 계속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산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뜻을 위한 삶이었고 민족을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기 6개월 전에 태어나 뜻을 위해 싸워나오던 세례 요한도 그가 뜻을 대해 나타나게 될 때 그의 생활환경은 비참했던 것입니다. 그도 비운의 환경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000년 동안 예고해 왔던 메시아 한분을 위해 광야에서 30여년 동안 준비했던 그의 생애야말로 어느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생활이었습니다. 오직 그만이 아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이런 심정을 품고 30여년간 피어린 슬픔의 생활을 거쳤지만 예수님이 자기보다 더 내적인 비운에 사무쳐 있는 스승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마태나 요한도 역시 비운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4000년 역사를 대표하고 천상의 비운이나 지상의 비운이나 온 인류의 비운을 대신하여 역사상 어느누구도 느끼지 못하던 최고의 비참한 심정을 느끼면서 이 비운의 역사가 있게 한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한 존재가 이땅에 나타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존재를 하늘이 내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4000년 복귀역사 가운데 어느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최고의 비참한 심정을 느끼시면서 이 비운의 역사가 있게 했던 사탄과 대결하여 승리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 자신은 요셉가정에서 30년의 사생애 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비운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은 민족을 품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나타내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교단과 종족까지 품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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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의 성도의 책임
그런데 자기의 가정과 종족, 교단과 민족을 품으시고 싶은 심정을 지니신 예수님이었지만 예수님은 민족으로부터 핍박당했고, 교단으로부터 조롱당했으며, 종족으로부터 몰림을 당했고, 끝내는 열 두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면 대성통곡해야 할 슬픈 일이요, 인간들에게 저주를 돌릴 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원수들에 대한 적개심을 극복하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가는 길이 막힌 것을 아신 예수님은 어느 누가 역사적인 비운의 심정을 인계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내적 심정을 위로해드릴 것인가를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따르고 있던 수많은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복을 인계해줄 줄 알았고 유대교단의 축복을 성취시켜줄 줄 알았으며, 자기들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천국을 만들어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더라 이겁니다.

선조들이 걸어온 공식적인 길을 거쳐가야 할 입장에 선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해야 할 사명이 크면 클수록, 혹은 이념이 높으면 높을수록, 책임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당시에는 그 민족이 당신을 반역하지만 앞으로 자신의 복음이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세계적인 원수들이 굴복해 들어올 것을 아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민족적인 원수의 입장에 설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밟고 올라가 세계적인 원수를 굴복시킬 것을 생각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이 요셉가정에서의 30년 사생애라든가 3년공생애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역사적인 비운을 대신한 분이요 천적인 비운을 대신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가 5병 2어의 기적을 보여줄 때에는 자신의 메시아요 민족을 구해주는 구세주로 믿었는데, 정작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는 다 버리고 돌아가버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하늘을 대한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 즉 하나님에 대해 사무친 심정을 지니신 분이요 전체의 섭리역사를 책임지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사정을 깨달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또 먼저 따르던 무리들을 따라 민족 전체가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4000년 복귀역사를 영광의 한 페이지로 장식했어야 할 예수님의 복음의 역사는 피의 제단을 통한 눈물의 역사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날까지 계속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염려해서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을 염려하고 후대의 수많은 인류를 염려해서 드린 기도였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가진 것이 없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아는 것이 없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낙망할 일이 있다면 역사과정을 거쳐 싸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 입니다. 또 선지 선열들이 피의 제단을 쌓아오면서 수고한 그 심정을 느끼지 못한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참 친구가 되는 것을 시기하며 유혹하던 사탄 대해 비장한 각오와 사무치는 적개심을 갖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 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나온 역사과정을 회고해 보게 될 때,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서야 가정적인, 혹은 민족적인 비운의 고개를 넘어갔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계적인 비운의 장벽을 넘어야 할 우리들은 노아가정의 실수를 잊어버리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세례요한의 실수를 반복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인간 타락 이후 6000년이 경과한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전체적인 슬픈 심정을 느낀 사람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아버지여! 나를 세워 노아와 아브라함과 야곱과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전체적인 아버지의 심정, 즉 타락하기 전 아담을 사랑하셨던 심정, 또 타락 이후 인간들을 대하시며 나타내지 못하셨던 사무친 원한의 심정까지 내 마음으로 느껴 `역사적이고도 우주적인 제물이 되겠나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이후 지금까지 채찍을 들 수 없는 서글픈 자리에 계셨던 것을 누가 알아드렸든가?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었지 공분 공의의 하나님이란 것을 인간들은 몰랐었습니다. 과정에서는 사랑으로 대해 주시지만 최후에는 심판하고 때려야 할 입장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분의 심정도 갖고 계신 공의의 하나님이란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가나안 7족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복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끝날의 성도로 불림받은 여러분, 남다르게 뜻을 따라나선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명제를 걸어놓고 여러분을 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날에 처하여 있는 우리는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 동시에 그심정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원한을 품고계신 아버지를 해원해 드리기 위해 싸워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참아들의 입장에서 이런 사명을 완결짓기 위해 오시는 분이 왈 재림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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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종교의 역할과 사명
여러분 보십시오. 노아 때에는 방주를 중심삼고 쳤고, 아브라함 때에는 제단을 중심삼고 쳤으며,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민족을 중심삼고 바로를 쳤으며, 예수님을 중심삼고 사탄세계를 치려다가 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이란 명사를 걸어놓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앞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어떻게 넘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 개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천국문은 억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이 비운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이 비운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맺혀진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가나안을 향했던 이스라엘의 소망을 갖고 싸우는 용사들이 되어야만 이 고개를 다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의해 여러분의 생애노정을 가만히 헤아려본다면 앞으로의 종말시대에는 여러분이 넘어야 할 비운의 고개가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개인적인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문을 통과한 다음에는 가정적인 문, 그리고 국가, 세계적인 문까지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어떠한 사명을 맡고 있는가. 여러분은 옛날 선조들의 비운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지 않으면 시대적인 사명을 맡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혹은 세계적인 사명을 맡아야 할 입장에 있지 않으면 영원한 섭리의 뜻을 책임진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무엇을 지향해 나왔는가. 세계역사는 천적인 메시아를 향해 움직여 나왔습니다. 그래서 비운의 역사는 이제 지나갈 것입니다. 신앙적인 시대도 지나갈 것입니다. 새로운 사명을 갖고 세계적인 비운을 해결하려 오시는 메시아가 온 누리에 스며 있는 비운을 해결할 때까지 여러분은 용기를 갖고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복귀섭리의 종말기에 처한 여러분 가운데는 역사적으로 내려온 모든 탕감조건을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해야 하는 이 때에 있어서 한때의 운을 맡은 사람도 있고, 시대의 운을 대신한 사람도 있으며, 세계의 운을 대신한 사명자와 천운을 대신한 사명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연결시켜 규합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도인들과 종교인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또 실제 이 사명을 완결하는 것이 종교의 사명입니다.

우주가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 인간들은 무엇을 중심삼고 나왔는가. 지금까지 인간들은 부모와 부부와 자녀의 사랑을 목표로 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무슨 도니 무슨 주의니 하며 역사와 시대는 변천해 왔지만, 부모와 부부와 자녀의 도리와 법도는 한 번도 유린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끝날에 처한 인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인 정을 넘어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도를 찾아가는 노정에 있었던 이제까지의 도인들은 처음부터 개인적인 정을 끊어버리고 출발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의 세계에 있어서의 싸움인 것입니다.

인간의 정적인 문제가 역사적인 신앙의 목표였었지만 이것으로 천륜의 종적인 이념과는 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6000년 인류역사가 이 하나를 세우기 위해 나왔지만 이것으로서는 우주적인 문제가 전부 해결되지 않으므로 천적인 생의 법도를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가진 종교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후 이제 천운의 시대에 돌입할 그 때에 있어서 세워질 수 있는 참부모와 참자녀와 참부부는 어떤 사람들일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쳐 있는 우주적인 고난을 체휼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느낀 사람들일 것입니다.

6000년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인간들은 인간의 종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횡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종교를 지향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종말시대에 있어서 부딪치는 이러한 고개와 모든 장벽들을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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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갈 길
하나님은 오랜 역사를 거쳐오시면서 인간들을 대해 모든 것을 참아나오신 참부모이신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그다음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은 신랑 신부, 즉 천적인 정(사랑)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최후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중심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었다,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류를 향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 기준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비운의 장벽을 넘어가기를 바라셨는데, 이런 일을 감당하는 조상의 입장에 있었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은 2000년 동안 신랑의 비운의 심정을 품고 오신 예수님의 심정과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품었던 비운의 심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고 예수님 앞에 한 형제자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면 사탄이 여러분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공격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주의나 이념, 새로운 종교, 새로운 중심인물이 나와 이것을 당해낸다면 사탄의 공격까지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몰아내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다시 혁명과 변환이 없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영원한 이념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당에 가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건설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이 먼저 천국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천국인이 되려면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와 심정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땅 위에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하고, 주님과 선조들의 마음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가 동원되어 역사적인 비운의 장벽을 넘으려 하고 있는데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 일을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적인 최후의 비운의 장벽을 박차고 나설수 있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운의 심정과 역사적인 비운의 심정과 현실에 남아 있는 비운의 심정과 미래에 사무칠 비운의 심정을 알아서 우리를 가로막는 참부모의 원수, 참자녀의 원수, 참신랑 신부의 원수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적개심에 불타는 아들딸이 아니면 최후의 심판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명, 시대적인 사명, 미래의 뜻을 세워야 할 사명을 앞에 놓고 있는 여러분은 현재 어떤 시대에 서 있느냐? 여러분은 때에 대한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는 천주주의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불원간 아무나 갖지 못하는 하늘 대한 심정과 사탄 대한 적개심을 가진 분이 나와 이 세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그때 그분을 모시고 협력해야 할 사명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사는 것도 아버지 뜻을 위해 살고, 생애노정을 걸어가는 것도 아버지의 뜻을 위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선조들이 걸어간 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에 나왔던 이스라엘민족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몰리고 고난당했고, 예수님이 민족과 교회로부터 배척당하였고 가정으로부터 불신당하였는데, 여러분도 이런 슬프고 억울한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억울한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고난당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고 주의 서러움이 내 서러움이요 선조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천년 만년 그 뜻을 위해 변치 않고 단결하여 사탄 대한 적개심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청년 남녀를 하늘은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장로들에게 뜻을 다 맡길 수 없습니다. 그들이 책임 못하면 집사들, 집사들이 못하면 청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교단과 민족을 살릴 수 있다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적인 비운에 사무친 진실한 청년들을 하늘은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이런 사명을 맡겼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을 느끼고, 아버지의 슬픔을 내 몸에 품고, 원수를 향해 진격할 수 있는 정병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과 이념을 통일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서러움과 예수의 서러움과 선조들의 서러움과 후손들의 서러움을 해원하기 위해 싸워야겠습니다.

이제 비운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자신의 전부를 바치고, 자신이 천대받고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대신하여 민족과 세계 앞에 제물되겠다는 각오를 하면서 스스로 손을 들어 하늘 앞에 맹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