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8 to 3-256: 하늘은 우리들을 부르고 계신다

하늘은 우리들을 부르고 계신다
1958.01.05 (일), 한국 전본부교회

3-248
하늘은 우리들을 부르고 계신다
창세기 3:1-14

인류가 비애가 시작된 동기를 우리는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인간조상이 하나님의 품에서 추방된 사실도 이 성경말씀을 보고 잘 알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이상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후에 하나님을 모시고, 만물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천주의 중심존재로서 아담·해와를 지으셨으나,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뤄지지 않은 채 남아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만물의 탄식이었습니다.

3-248
타락한 아담을 부르시던 하나님의 심정
영원한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즐겨야 할 인간의 행복과 희망은 여기서 부터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영원한 이념을 중심삼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누려야 할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만물의 희망이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이 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인간의 서러움과 하나님의 서러움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있는 정성을 다하여 지으셨습니다. 더구나 만물의 주인공이 아담·해와를 지으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있는 정력을 다 기울였으며, 수고 중의 수고를 하여 하나님이 임재 할 수 있는 성전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도 그들을 인간과 영원히 동거하게 하여, 그 모습을 보고 당신이 즐거워하는 동시에 인간이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동시에 인간도 기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창조의 목적을 세우셨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한번도 이러한 때를 맞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때를 다시 찾으려 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대하여 `아담아, 아담 아!’ 부르시던 그 서러운 심정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 즉 창조주를 배척하는 아담·해와를 대하여 하나님도 그들을 배척해야 할 입장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담을 찾아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아담·해와 두 사람만을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역사적인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창조 이후 아담을 부르시던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오늘날까지 이땅의 인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당시에 아담을 부르신 그 음성은, 오늘날에 와서는 6000년 한(恨)의 역사를 대신한 서러움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창세 이후 타락권내에 있는 전체의 한을 대신한 서글픈 심정으로 아담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담으로부터 6000년이란 긴 역사를 지내왔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일을 현세에 연결시켜 오늘날 제2아담 제2해와인 우리를 대하여서도 그와 같이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타락 이후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온 신앙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서 하나님이 아담·해와를 대하여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땅을 대하여 통분해 했고, 하나님 대신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 이후에 아담·해와를 부르시던 하나님의 그 안타까운 심정, 즉 허락치 않은 자리에 나아가 타락하게 된 아담의 모습을 대하게 될 때 형용할 수 없이 안타까웠던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그 심정을 부둥켜 안고 같은 마음으로 안타까와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이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다시 구원섭리를 해 나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통해 수많은 선지 선열들을 세워가며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해와를 부르시던 그 음성이 아직도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 160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간곡한 심정으로 아담을 부르셨으며, 하늘 대하여 충성할 수 있는 노아 한 존재를 붙들고 비로소 `노아야, 노아야!’ 하고 부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음성을 우리는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3-250
하나님의 해원을 위해 고통받은 선조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던 서러운 심정을 해원하기 위하여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를 불러놓고 120년 동안 염려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안 자가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해원의 한날을 위하여 120년 동안 염려하시며 노아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안 자가 땅 위에 없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아담·해와를 잃어버리시고 서러워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눈물 없이는 대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복된 자리에 머물러야 할 아담이 하나님의 품에서 추방당하게 될 때에 느끼셨던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체휼하는 자가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서러움은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한이 맺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자체를 대하여 이 시간도 해원하시며 한서린 호소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뼈와살, 몸과 마음에 사무치도록 울고 울어도 한이 없고, 서글퍼하여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선지 선열들,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섰던 조상들 가운데는 서글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섰던 사람은 고통의 길을 피하여 가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야곱도 그랬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을 대표했던 모세도 그랬고, 세계를 대표하여 왔던 예수, 즉 만민의 구주(救主)였던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 대로 서러워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통분해 하실 때 같이 통분해야 하겠습니다.

아담·해와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들만을 중심한 기쁨을 찾아가려고 했던 사실이 역사노정에 슬픔의 조건으로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슬픔의 땅이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천륜(天倫)을 망각한 자기위주의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이 어디서 부터 비롯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하늘의 슬픔을 망각하고 하늘의 통분 함을 망각하며, 자기 일신의 만족과 안일을 찾아나온 데서부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과정에 왔다간 선지 성현들의 눈물의 결정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곤고와 비통 속에 있는 하늘의 대신자가 되어서 하늘의 슬픔과 분함과 억울함을 알아 악을 대하여 싸워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를 옹호하고 예수님을 옹호하고 역사적인 선지 성현들을 옹호하면서 하늘을 위로해 드리는 사명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사람을 찾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 그리고 이땅에 왔다간 우리의 모든 선조들도 이런 존재를 찾아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생애 노정 가운데 하늘을 대신하여 곤고한 입장에서 만민의 배척을 받고 조롱을 받은 것이 몇 시간이었습니까?

타락한 인류는 슬픈 운명의 역사적인 노정에 처해 있는 고로 하늘을 찾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길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계의 철칙(鐵則)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슬퍼하는 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섭리의 뜻을 펴시는 동안 아들딸이 악한 세력한테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통분해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에 계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루속히 슬픔과 비통과 분함에서 벗어나 기쁨의 날을 맞이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망인 것을 알아야되겠습니다.

인간 타락 이후 6000년의 역사가 경과했지만 기쁨의 한날을 맞아 하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아들딸이 오늘 이때까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고로 하늘이 세우신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3-252
예수가 걸은 길과 유대민족이 걸은 길
이스라엘민족으로부터 추방당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 앞에는 눈물의 골짜기, 십자가의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배척받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정과 유대교단으로부터 추방당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이스라엘민족과 유대나라로부터 이단자 취급을 받아 추방당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듬어 보게 될 때, 그분의 가는 길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민족을 위한 길이었고, 그 종족을 위한 길이었으나, 당시 이스라엘민족이 가는 길과 예수님의 가는 길이 상반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반된 사이가 넓으면 넓을수록 하나님의 슬픔이 컸고 울분도 더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반(相反)된 길을 다시 상대적인 길로 전환시키기 위해 투쟁의 역사를 전개해 나온 것이 예수님 이후 2000년간의 신앙노정 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 한 자체를 온 피조만상(被造萬象) 가운데 세워놓고 마음 몸을 따로따로 떼어 그들과 견주어보면서 비판하여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비판당해 보십시오. 역사적인 선지 성현들 앞에, 또 오늘날 눈물을 머금고 슬픔과 고통의 길을 참아나가는 참다운 목자들 앞에 비판당해 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가 자랑하고 나설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죄의 보응을 받아 마땅한 자체인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이 역사적인 피눈물의 제단을 거쳐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 위에 여러분 자체를 올려놓고 승리의 결실체로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그 뜻을 배척한다면 그 민족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택함받은 아브라함을 반대했던 그 종족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서글픈 심정을 느끼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도탄 중에서 허덕여야 했고 슬픔과 탄식속에 빠져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 때에는 어떠하였습니까?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민족을 위해 하늘 앞에 호소하던 모세의 서글픈 심정과 그 애타는 마음을 무지한 백성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 민족이 그런 안타까운 심정을 알아 같이 안타까와했던들 이스라엘민족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유대역사를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오늘날까지 죄악의 역사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종교를 세워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 자랑거리를 남기고자 한다면, 서러운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기 위하여 `오, 아버지여! 그 서러움을 저에게 넘겨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고 계신 짐을 제가 대신 지고 가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며 나서는 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하나님의 서러움과 통분 함과 곤고함을 모르면 망하게 됩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역사적인 전통을 알아서 수호하여야 할 끝날의 성도들이 이러한 책임감을 느낀다 할진데, 그는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하여 남 모르는 눈물을 수없이 흘려야 합니다. 남 모르는 핍박을 받으며, 때로는 남 모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변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민족의 길을 걸으면서, 전인류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여 죄악을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이 민족 가운데 있다면 그들에게로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옮겨질 것이며 우주적인 사명도 그들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려야 하겠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인류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되겠고, 노아의 슬픔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려야 되겠으며, 아담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야곱 ·모세·예수님까지의 4000년에 예수님 이후 오늘날까지의 2000년을 합한 6000년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땅 위에서 한 아들딸을 찾아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아버지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그 손길이 추하고, 그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의 형색은 남루할지라도 그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서러움을 대신할 수 있고 그 마음이 천심과 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은 세계가 동원되더라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천륜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아신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배반하는 이스라엘민족을 위하여 서러워하였고, 핍박하는 교단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고, 십자가에 매다는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어줄수 있었던 것입니다.

3-254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오늘날 믿는 자들이 하늘 앞에 서려 하고, 또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서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느끼던 그 서글픈 심정과 옛날에 선지 성현들이 느끼던 심정을 체휼하지 못한다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걸어놓고, 국가를 걸어놓고, 세계를 걸어놓고 서러워할 줄 아는 아들딸 들이 나와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서러워하시는데 자기는 즐거워하겠다는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그런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천 대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 성현들을 통하여 자신을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있는 여러분, 오늘날은 각자가 처해진 입장에서 현재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과거를 회상하며 냉정한 비판을 내릴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오늘의 나를 세워서 이 세상에 무엇을 예고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세계주의의 때인 고로 가정을 위하여 눈물 흘릴 때도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서러움은 개인과 가정, 사회와 민족을 거쳐 국가적인 과정까지도 지났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대하여 서러워하십니다.

역사적인 복귀의 운명 앞에 자신의 역사관과 생활권이 부합되어야만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개체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각자가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해와의 입장임을 깨닫고 아버지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갖춰 놓아야만 여러분은 비로소 지금까지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시는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슬픔의 고개를 다 넘고, 십자가의 길을 다 거치고 나서 자유스런 해방의 몸으로 영원한 아버지를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찬양하며 모셔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소망이었으며, 그 소망이 이뤄지는 날이 바로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중심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부르심에 역행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종말에만 인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요, 오늘 이 시간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선(善)을 중심하여 나온 도(道)의 세계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중에서 천륜을 통하는 참다운 목자를 찾아야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 목자를 만났을 때 그를 따르기 위해서 죽음의 길, 즉 어떠한 난관의 길이라도 가겠다고 나서는 이는 먼저 하늘의 슬픔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은 이런 하늘의 사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워 서로 싸우게 되면 그 교단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다른 길을 나선 여러분은 민족을 대신하여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타락의 유업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그 한 존재가 나타나기를 소원해야겠고, 그 소원이 성취되는 날이 재림의 날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겐 축복해 주고 즐거워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없는 것이 원한 이요 슬픔인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삼은 가정이 없는 것이 슬픔이요, 하나님을 중심삼은 민족이 없는 것이 슬픔이요, 하나님을 중심삼은 국가와 하나님을 중심삼은 세계가 없는 것이 슬픔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체를 세워놓고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서러움과 현재의 서러움과 미래의 서러움을 느끼시면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누구를 택하여 아브라함의 후계로 삼을 것인가, 누구를 택하여 이스라엘과 야곱의 축복을 인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누구를 통하여 예수님의 유업을 이어받게 할 것인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십니다. 또 그것이 이 시대에 세워야 할 조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3-256
소명받은 사람이 가는 길
인간의 역사를 회고해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6000년 동안 말할 수 없이 서러워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와 성신이 그랬고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이러한 하나님을 해원해 드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부패한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 앞에는 눈물로 넘어가야 할 민족적인 골고다의 역사적인 운명길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 우리는 여기서 승리의 실적을 남겨야 하는 섭리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섭리사를 중심삼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인류를 대하시면서 서러워하셨고, 현재에도 서러워하고 계시고 미래에까지도 서러워하셔야 하는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민족을 책임지고 나선 모세를 배척하였던 그 민족은 깨어져 나갔고, 또 세계를 책임지고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게 될 때 그 이스라엘은 세계적으로 유리하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실증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지만 우리가 하늘을 중심삼고 세계 앞에 불쌍한 민족이 된다면, 즉 이 나라가 세계를 대표해서 어느 나라보다도 불쌍한 자리에 선다면 여기에는 소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굶주리고 탄식하면서 서러운 눈물을 흘린 것이 이 민족의 실적이 된다면 이 민족은 죽음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민족은 앞으로 세계를 지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앞에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수호하고, 모세가 간 길을 수호하면서 역사적인 고개를 넘어 제 1아담·해와의 입장을 대신하여 그들의 미비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본연의 창조이념을 다시 찾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쁨으로 대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 아버지의 축복과 영광을 받음으로써 만물과 더불어 화동하는 그날을 맞이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은 역사적인 모든 서러움을 넘고 슬픔의 고개를 거치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