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5 to 2-278: 우리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
1957.06.16 (일), 한국 전본부교회

2-255
우리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
마태복음 25:31-46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이 고을에서 쫓기면 저 고을로 피해 다니시던 그리스도의 3년 공생애노정을 이 시간 저희들이 상고해 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심을 지니시고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곡한 심정으로 무한히 서글픈 눈물을 흘리셨으나, 이스라엘민족들은 반대의 화살로 그를 부인하였고, 갖은 중상모략을 다했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다시 느껴야 되겠나이다.

오늘날 저희들은 옛날의 유대교인과 옛날의 바리새교인과 옛날의 유대백성들을 경솔하게 평하여 그들이 당시에 잘못했던 일들을 책할 때가 많았사옵나이다. 그러나 저희들은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그 당시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반대하여 그분을 빌라도에게 내주고도 남을 속된 인간들이요, 오히려 그들보다 더 못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고 우주는 변하고 있으며 섭리의 때는 돌아가고 있으나, 복귀의 새역사는 돌 고비를 돌지 못하여 아직도 이 땅에 탄식과 원망과 원한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불신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천륜이 파괴될 수 있고, 하늘의 일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셔서 여기 있는 아들딸들 천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제물된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 나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이 하늘 것을 하늘 것으로 세우지 못할 때 아버지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을 알고, 이제 저희들, 하늘 것을 하늘 것으로 세워드리고 저희 자신의 것까지도 하늘 것으로 바쳐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 있는 아들딸들의 마음을 아버님께서 하나로 묶으시옵고, 받는 자의 마음과 주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며, 저희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되게 하셔서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뜻 앞에 귀결되어 화동의 주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은사 앞에 화합할 수 있는 자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본질과 본성이 아버지를 영원히 흠모해야 하는 것을 아오니 저희들이 갖고 있는 이지적(理知的)인 마음과 저희들이 갖고 있는 제물이 아버지를 흠모하려는 마음을 막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 자신은 지극히 작은 존재인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엄연하신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스스로의 부족함을 직고하고 천진스러운 마음으로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흠모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을 오로지 아버지 앞에 맡겼사오니 인도하여 주시옵고, 곳곳에 널려 수고하는 식구들에게도 같은 은사로 나타내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2-256
말 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제목은 `우리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입니다.

2-256
하나님·예수님·인류의 소망
타락한 인류는 자신들의 소망이요, 이상인 영광의 날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한날을 찾기 위하여 6천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수고하여 오셨고, 예수와 성신도 2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싸움을 거듭하면서 수고하여 오셨고, 또 하늘을 신봉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이 한 날을 찾기 위하여 무한한 희생의 고개를 넘어왔음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고개는 백번 죽고 천번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고개입니다. 이 고개를 넘기 위하여 이제까지 인간만이 동원된 것이 아니요, 많은 교단은 물론이거니와 영계의 수많은 도주(道主)들, 더 나아가서는 삼위신이 동원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절절히 느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 한날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년간 참아오셨고 인간들은 수많은 고통과 역경을 거쳐 오면서 새로운 소망, 새로운 지도이념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두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창조된 피조만물은 하나님의 그러한 뜻에 귀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인간이 하늘과 땅이 기뻐할 수 있는 그 한날을 찾아세우지 못한다면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수고와 인간의 수고는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소망의 한날을 새로이 소개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성취시켜 드릴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재료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힘과 재료를 갖추기 위해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소망하신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한날을 찾아 세우고, 천륜과 인륜을 이 땅에서 찾아 세우고,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나 인간, 또는 만물 앞에 그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승리적인 발판을 마련해 주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민족은 예수님을 최고의 영광의 주, 인류를 대표한 만민의 주인공으로서 모시고 자랑할 수 있는 때와 환경을 맞았고 천적인 은사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러한 은사를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려 하신 새로운 승리적인 터전은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거쳐 오늘날까지 2천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역사(役事)해 나오시면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시 이 땅에 오셔서 30여년의 생애를 바쳐 이루시려다 못 이룬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 당신과 성신의 영광, 만민의 영광이 될 수 있는 한날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이러한 날을 맞아 역사의 종국을 거쳐나가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끝날에 우주적으로 나타나는 영광의 날, 하나님이 바라시고 예수님과 성신이 바라시고 인류가 바라는 새로운 영광의 날을 어떠한 자세로 맞이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2-258
영광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태도
과거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서러움의 발자국을 거쳐 다시 인류를 찾아 오시게 되는데 그때에 또 다시 과거 이스라엘민족이 걸어간 전철을 되밟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늘의 영광이 찾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자요, 예수님이 소망하는 한날을 가로막는 자요, 인류가 소망하는 한날을 가로막는 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을 맞이한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인들은 4천년 동안 소망해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영광의 한날을 기쁨으로서 맞이하지 못하였던가, 어찌하여 예수님을 민족의 지도자로 모시고 만민 앞에 영광의 한날을 세우지 못하였단 말인가! 이것이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 앞에 저지른 범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 유대민족이 이 땅에 하나님을 중심한 국토를 찾고 하나님을 중심한 백성을 찾아 천국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왕국을 찾아 세웠던들, 오늘날, 우리들은 주님을 기다리던 이스라엘민족의 소망을 우리들의 소망으로 물려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의 실체로 모시지 못하고, 또한 역사적인 주인공으로 모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전부 중단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이 민족적으로 교단적으로 천륜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던 것입니다.

민족과 교단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 즉 이땅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환영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서러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서러움이 민족의 서러움으로 남아졌고, 교단의 서러움으로 남아졌으며, 각 개인의 서러움으로 남아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느냐? 우리들은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과 개개인이 범한 죄악을 책임지고 개인적으로, 교단적으로, 민족적으로, 세계적으로 이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역사과정을 지내오면서 이 죄악사를 청산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기쁨의 역사가 되어야 할 인류역사는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이렇게 슬픔의 역사로 남아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불신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기독교인들도 그것을 탕감하기 위한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인류를 대신한 영적 이스라엘의 책임이 있는 여러분들도 이런 탕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며 또 여러분은 외로운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믿는 민족에게 그 교리를 전파하여 기독교 신앙을 세우려 할 때는 반드시 피의 제단을 쌓아야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노정을 걸어온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순교의 길이 개인을 거쳐 가정, 민족, 세계에까지 확대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중심하고 투쟁의 길을 거쳐오면서도,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면서도, 일그러지고 엉크러지면서도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따라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길을 걸어온 선지 성현들이 여러분의 선조 가운데 많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래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모시게 된 것은 그 민족이 잘나서가 아니요, 유대교단의 수고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4천년 동안의 역사과정에서 민족을 대표하여 하늘을 염려하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온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하늘의 뜻을 세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원한이 이 땅에 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를 믿고 있는 우리, 역경의 길을 거쳐 세계적으로 이 원한을 청산하여 영광의 한날을 맞이해야 할 우리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우리는 2천년 전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던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과 세계적인 영적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2-260
섭리의 전통을 계승한 예수님의 精兵
지금 우리들은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이 책임 못한 원한을 청산하기 위하여, 반대하는 민족을 대하여 싸울 수 있고 반대하는 교단을 대하여 싸울 수 있는 예수님의 정병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그를 십자가의 죽음길에 내보내려고 하는 가이사일파와 대적하여 국가적인 투쟁을 거쳐 이를 저지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대표하는 어떤 민족이 이러한 민족적인 승리의 기대를 찾아 세우기를 소망하시며 지금까지 싸우시면서 어려움을 참아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와 성신은 왜 싸워야 했던가. 평화의 예수님이요, 평화의 성신이요, 평화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6천년간 이 땅에서 악의 판도를 넓혀온 억만 사탄으로부터 인간을 수호하고 악의 역사를 종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의 이러한 고충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자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인가? 이것은 사탄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하늘권내에 있는 아들딸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 죄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사탄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이상을 숭상할 수 없고, 거기에는 천국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민족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어느 누구를 원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더라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만큼 이스라엘민족을 대하여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무리들에게서 예수님은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4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하여 오신 하나님의 수고를 느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한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피의 제단을 닦아온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자신을 십자가에 내준 이스라엘민족에 대해 하늘에 심판을 호소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섭리역사를 회고하여, 즉 인간들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반대하더라도 사탄과 분별된 곳에 있을 때는 하늘이 그들을 용서하심을 보고서 하나님과 같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심판을 모면하여 기뻐하는 자리에 선 경우가 있었을지 모르나 하늘이 심판을 하시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역사성을 대신하고, 섭리성을 대신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용서해 주는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의 영광을 받으려면 어떠한 입장에 서야 되겠느냐? 예수님의 사정과 통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세워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신 걸음을 더듬어서 하늘 앞에 나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이 죄악의 땅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피의 걸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서, 하늘이여, 심판의 채찍을 참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섭리역사를 계승할 수 있는 민족적인 이념, 세계적인 이념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형태와 내용이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그 사회, 국가에 속한 개개인의 행동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좋은 행동은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요, 나쁜 행동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삼고 살아가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이상세계, 영적인 이스라엘의 이상을 실현시켜 나가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겠고, 실제 그렇게 생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소망의 한날을 고대하면서 수고하고 투쟁하여 오신 하나님의 전통을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또, 섭리적인 전통, 역사적인 전통, 종족적인 전통을 세워나갈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이러한 일을 성취하였다면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 하나로, `메시아’라는 이름 하나로 온 이스라엘의 성읍(城邑)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2-262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불신당한 이유
예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탄생할 때 동방의 세 박사, 그들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 시대의 점장이들인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을 때에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소동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민족은 말로만 메시아를 고대하였지 어느 때 어디에서 메시아를 만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하늘이 보내는 사람이나 천륜이 어느때 어느 곳에 나타나더라도 그를 불신하지 않고 척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은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사실과 역사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겉으로 보고 비판할 줄은 알았으나 내용은 알지 못했습니다. 즉, 볼 줄은 알았으나 맛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그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줄만 알고, 그 마음을 몰라서도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높이 받들 줄은 알지만. 예수님이 비천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니고 계셨던 분이란 것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민족이 저질렀던 역사적인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하여 다시 영광의 날을 맞이하게 될 때, 여러분은 이스라엘민족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그날을 맞이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예수님의 행로를 살펴보면, 사도를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기쁠 때 따르던 무리도 있었고 슬픔 때 따르던 사람도 있었으며, 재출발할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쁠 때 예수님을 환영할 사람이 많았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5천명을 먹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을 제시하여 민족의 마음을 움직일 때는 많은 무리가 그를 옹위했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어찌하여 전진하는 역사과정에서 주위환경을 헤쳐 나가지 못하고 도중에서 쓰러지게 되었던가….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땅을 향하여 갈 때 모세를 불신했던 그 역사 노정을 반복한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할 때, 그의 뜻과 그가 세운 표준이 민족의 뜻이나 민족의 표준과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는 모세는 그가 지향하는 목적지가 뚜렷하였고, 방향이 뚜렷하여 1년 후 또는 10년 후의 일을 내다보며 살길을 생각하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천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하여 이스라엘민족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서 이스라엘민족이 떨어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원래 아브라함에서부터 4백년 역사를 거쳐 영광의 한날을 맞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던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그 한날을 맞지 못하고 광야에서 쓰러졌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뚜렷이 했고, 10년 혹은 20년 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생활권내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스라엘민족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예수님과 달랐고, 그들의 생활이 영원을 향한 섭리의 뜻과 달랐기 때문에, 좋을 때는 예수님을 환영하였으나, 자기들이 불리하게 되면 서슴치 않고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조건적인 목표를 설정했었고, 조건적인 방향을 잡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반기를 들고,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또 예수님의 죽음길을 재촉하던 이스라엘민족은 모세를 배반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던 불신의 행동을 되풀이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가나안땅을 목전에 바라보면서도 광야에서 40년간을 헤매야 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2천년간 세계적인 가나안복지의 이상을 바라보며 헤매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을 품고 계신 예수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했던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님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몰랐고, 하늘 가는 길을 직선으로 올바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개인만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세계를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고, 또 자기들의 영원한 생명까지도 책임진 분임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민족이 예수께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을 따라야 했었고, 민족을 위해 오신 분인 줄 알았다면 민족을 저버리고라도 그분을 따라야 했으며, 교단과 세계를 위해 오신 분인 줄 알았다면 교단과 세계를 버리고라도 그분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이 이러한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불신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후 오랜 동안 탕감의 길을 거쳐 온 것입니다.

2-264
전체를 위한 희생의 價値
뿌린 대로 거두어지는 것이 천리원칙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역사의 출발때부터 뿌려진 것도 그대로 거두어지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역사상에 뿌려졌던 모든 것을 그대로 거두는 날이 끝날이요, 영광의 한날을 맞을 수 있는 날이 끝날임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을 배반하던 이스라엘민족과 같은 입장에 서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향하고 있는 신앙의 방향과 목표, 그리고 여러분들의 생활환경은 6천년 동안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하고, 예수와 성신이 재촉하고 있는 그 방향에 부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기에 일치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안 오시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여러분 자체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받기를 원합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갈 길을 다 간 후에, 싸울 것을 다 싸운 후에야 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길을 거쳐서 부활하셨듯이 여러분도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거친 후에야 소망의 한날, 부활의 한날, 기쁨의 한날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바알신을 섬기자,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 나가 자기를 죽여주기를 간청하면서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했는데, 그때 여호와께서 바알에게 굴복하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교계는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고, 혼돈되어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처해 있는 여러분은 민족을 붙안고 여호와께 호소하던 엘리야의 심정과 통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민족이 먹을 것이 없고,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여 광야에서 40년간을 헤맬 때, 시내산에 올라 40주야를 금식하며 여호와께 호소하던 모세의 심정과도 통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자기 일신의 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자신을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제 세계적인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며 나가는 우리들도 이러한 모세의 심정을 이어받아야 할 택함받은 이스라엘백성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전진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 이제 제3자의 입장에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한번 비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한날 예수님처럼 민족을 위해 슬퍼한 적이 있습니까? 어느 한날 예수님처럼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또, 유대민족이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놀고 있을 때에도 민족을 위해 40주야간 기도하면서 남모르는 가운데 눈물로 무릎을 적셨던 모세와 같이 민족을 위해 눈물의 제단을 쌓은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하고 여러 형태의 문화를 갖추게 된 것도 현재의 인간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외롭고 험난한 비탈길을 거쳐왔기 때문이요, 움막이나 토굴같이 외로운 곳에서도 외로움을 이기며 죄악과 싸워 왔기 때문이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2-266
새로운 信仰의 길을 찾아 전진해야 할 때
이제 인류는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민족이나 그들의 지도자였던 제사장들 같이 편안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거나, 신앙을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때는 예수께서 골고다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동산에 올라 홀로 하나님께 단판기도를 하시던 때와 같은 어려운 때입니다. 또, 모세가 이스라엘 60만 대중을 대신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생명을 걸어놓고 40주야를 간곡히 기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과 세계를 위해 간곡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끝날에는 이와 같은 사명을 담당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많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진실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모세 때의 12지파와 70장로, 예수님 때의 열두 사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들의 사정을 다 버리고 시내산에서 40주야 금식기도를 하고 있던 모세를 옹위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스라엘민족이 되었던들 그들에게는 광야에서 표류했던 원한의 40년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함께 엎디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도가 있었던들 고난의 2천년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조들의 역사적인 이러한 과오를 용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서 세계적인 원한을 종결시켜 하나님이 바라시는 행복의 동산을 복귀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은 본향의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러 간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외로운 자리에서 깊은 기도를 하실 때에는 아무에게도 안 가르쳐 주었습니다. 베드로·요한·야고보 등 세 제자에게까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때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조상이 하나님 몰래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한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을 때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워 놓아야 할 섭리적인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역사과정을 거쳐 오면서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한날을 바라보며 하나의 관문을 넘어가야 할 말세에 있어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초월한 자리에서 민족과 세계와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이하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자기들만을 위해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고, 예수께서 좋은 일을 해도 자기들만을 위해 하는 줄 알았으며, 예수께서 천한 자리에 들어가도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을 근본적으로 용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끝날에 처한 이때, 영광의 한날을 찾아나가야 할 여러분들은 이제 어떠한 입장에 서야 되겠는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런 개인적인 생활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나아가 이것이 세계와 온 우주를 대신할 수 있는 발판적인 환경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런 환경을 만들면 그것이 뭉쳐져서 세계적인 이스라엘의 생활환경이 형성돼 나갈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현재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것을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 하나를 세우고 나 하나의 행복만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넘어서 하나님에게 신앙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기쁘실 때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염려하는 마음을 지니셨는데, 그를 따르는 군중들은 그러한 기쁨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이 지상에서 자기들이 목적한 바를 성취하고 자기들의 지상명령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염려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도 그러한 자리에 서면 앞날이 막혀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가신 길은 어떤 길이냐? 방금 말씀했듯이 예수님은 자기를 저버리고 기쁠 때에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부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도 예수께서 기뻐하실 때에 기뻐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중심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에게 귀일되는 목적을 세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귀일되는 목적을 세울 줄 아는 여러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와 우리는 갈라질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이 갈라지고 여호수아와 갈렙으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이 갈라진 것과 같이 갈라질 것입니다. 또,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과 같이 산양과 면양으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2-268
復活의 기준
그런데 최초로 가인과 아벨이 갈라진 장소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부터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때도 하늘에서 심판의 행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인간들을 중심삼고 선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마음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즉, 천륜을 세우려는 마음과 자기를 중심한 인간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두 마음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선악의 분기점(分岐點)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의 소망을 향해 어떠한 역경도 뚫고 나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생기면 그 기쁨을 민족과 하나님께 연결시키고, 또 우리에게 소망스런 일이 생기면 우리 개체에서 끝나는 소망이 되지 말게 하고, 그 소망을 민족과 세계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예수께서 기뻐하실 때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예수께서 괴로와하실 때 예수를 위로해 드리면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하시게 됩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성부 성자 성신이 긍휼히 여길 수 있으며, 성부 성자 성신이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뜻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고, 천륜의 뜻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그 사실이 하나님의 부활의 손길을 받을 수 있는 기준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부활의 영광을 바란다면 스스로 부활의 기준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기준을 세우며 살아나왔습니까? 부활의 기준을 세워 나왔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나가야 할 목표와 방향을 확실히 설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역사상에 인간이 세운 어떠한 기준보다 더 강하게 여러분을 자극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우지 못하면 처음부터 뜻을 따라 나왔다 할지라도 얼마 안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님 앞에 반기를 들고 그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이제 여러분 자신이 나가야 할 목표가 천륜을 세우는 것이요, 하늘과 땅을 위하는 것이요, 인륜을 세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여러분들은 이땅의 어떤 불리한 조건이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어느 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를 물리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러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어야만 통일교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을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도 예수님과 같은 심정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도들은 그만큼 자신들이 영광받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호령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날이 가면 갈수록, 따르는 사람 중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예수님에게는 그만큼 더 근심거리가 많아지고, 그럴수록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이 예수님에게는 더할 수 없는 슬픔이 되었지만 반대로 사탄편에게는 기쁨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근본적으로 선악 분별의 역사, 심판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최후의 판결을 앞에 놓고 있는 이때에는 만민과 민족을 대신해서 어려운 자리, 외로운 자리일지라도 하늘뜻을 놓고 즐거워하고, `할렐루야, 아멘!’ 할 수 있는 참된 사람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부활의 실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270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참사람
하늘뜻을 위해 가는 길은 혼자서 하늘의 영광이나 생명의 가치를 누리려고 해서는 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중심하고 남을 비판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입히는 그런 행동이 타락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끝날의 영광을 바라보는 이때에 여러분은 어떠한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애달픈 심정을 갖고 탄식과 수심에 싸여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시 그러한 하나님과는 달리 편안한 자리에서 자신만 즐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만일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세를 잃어버린 이스라엘민족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던 군중과 같이 비참한 입장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뜻을 이루기 위해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행동을 하면 산양과 면양으로 갈라지는 끝날의 분기점(分岐點)에서 산양편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과 심정일체를 이룬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슬퍼하실 때 같이 슬퍼하고 예수님이 기뻐하실 때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성도들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더욱 기뻐하셔서 천륜의 모든 뜻을 그들 앞에 나타내셨을 것이며, 영원한 승리가 그들에게 안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무리가 많아져도 믿고 당신의 모든 것을 인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말할 수 없이 처량하고 슬픈 심정이었는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몰랐던 것입니다. 끝날에도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근심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6, 7천의 무리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악과 대항하여 싸우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으로 호소하실 때, 인간들은 예수님보다 3배 이상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호소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요한·야고보는 3분의 1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를 수고하면 여러분은 그의 3배 이상을 수고해야 하고, 하늘을 대표한 사람이 하나를 수고하면 여러분은 그보다 3배 이상의 수고를 해야 하며, 하늘을 대신하는 사람이 하나를 염려하고 하나만큼 수난을 당하면, 그보다 3배 이상의 염려를 해야 하고 3배 이상의 수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3분의 1도 수고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 민족을 망하게 했고, 독생자 예수님을 팔아먹었고,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여러분은 진정으로 통일교회를 따라가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이 문(文)이라는 사람이 어떤 고충을 느끼고 있을 때 여러분도 3배 이상의 고층을 느끼면서 하늘 뜻을 세우기 위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런 사람이 되기는 커녕 자기만이 편안한 자리에 있고자 하는 이런 무리가 웅성댈 때는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주검의 무더기를 남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사탄이 침범할 것입니다.

역사의 종국을 맞게 되는 이 때에 여러분들은 6천년의 원한을 품게 한 사탄을 향하여 `내 어찌 너의 권한을 자랑하게 할소냐!’ 하고 외치며 혈혈단신 사탄과 싸워 승리한 실적을 하나님께 보여 드림으로써 온 우주 앞에 소망이 샘솟게 할 수 있는 영광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적당히 넘겨도 되겠지’하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272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신앙생활
여러분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는 심각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이 참이라 한다면 우리들은 심각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각오 여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책임을 지시고 구원해 주셔야 했기 때문에 행여 소망을 걸 수 있었으나, 영광의 주가 다시 오시게 되는 끝날에는 인간들이 책임을 못하면 다시 구원섭리를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구원십리를 완결하지 못하면 옛날 아담 해와가 타락했던 것 이상의 원한이 남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운 때를 맞이한 우리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정과 천륜의 뜻을 알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해 드릴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시면서도 겸손하였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가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 이하 12사도 및 수많은 군중들은 자신들이 기쁠 때에 예수님의 슬픈 심정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이런 입장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런 심정을 지니고 아버지를 불러 보십시오. 아버지는 살아계시기 때문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그와 같은 심정으로 땅을 위해 정성을 다하면 여러분은 하나님편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모든 원한을 풀어드리고 예수님을 죽은 제물이 아니라 영광의 산제물로 세워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할 2중 3중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돌아가시게 되었던가?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 없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이 땅을 사랑하신 분이요,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아가는 방향을 인간과 달리했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쁠 때에 같이 기뻐할 수 없었고,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못했으며,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신 길과 인간이 가는 길이 달랐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최후의 영광의 한날을 바라보며 하늘 앞에 나서서 “나를 만물 만상앞에 세워 주시옵소서!” 하며 요구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되겠는가? 한마디로 죽음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가는 정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셨던 이러한 길을 여러분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루만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30여 평생 한결같이 십자가의 기준을 세워놓고 싸워나오신 분입니다. 또, 며칠 동안에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한 것이 아닙니다. 30여 생애를 걸어놓고 4천년 섭리역사를 책임진 입장에서 `잘 되면 이렇게 될 것이요, 잘못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예상하면서 한날 한시도 골고다의 서러운 심정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민족.국가.교단을 다 뒤에 두고, 나면서부터 각오한 길,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께서 생애를 통하여 세우신 골고다의 승리의 조건들을 여러분의 생활에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다가 예수께서 뭇사람들의 배척과 비난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죽음의 길을 가시게 될 때, 얼굴을 돌이켰던 제자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상기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2-274
구레네 시몬과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의 신앙
예수님은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대신하여 매를 맞고 당신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면서 골고다의 죽음길에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애타는 음성이 들려오기를 소망하였습니다. 3년, 혹은 30년 생애를 통하여 이와 같은 음성이 들려오기를 소망했으나 그 소망이 사라지게 될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아픔을 체휼하여 그 아픔을 동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 나 자신도 온 세상 만민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죽음길, 천만번 죽는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면서 심히 지쳤을 때,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구레네 시몬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택함받은 이스라엘민족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사람인 구레네 시몬만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이방의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 나가겠다는 여러분, 여러분은 꿈에서라도 구레네 시몬과 같은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변명할 수도 있었고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묵묵히 순응하여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3년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한 사도들은 온데간데없고, 생각지 않았던 이방의 구레네 시몬이 당신을 대신하여 처참한 입장에 서게 될 때, 이를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은 민망함이 컸을 것이고, 슬픔에 슬픔을 더했을 것입니다.

만일 12사도 중에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며 죽음의 고난도 잊고 도리어 그를 동정하면서 당신의 아픔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예수님은 슬픔에 슬픔을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기독교계에 있어서도 구레네 시몬적인 교단이 나타나야 하겠는데 어떤 교단이 이 책임을 맡겠습니까? 따르고 있던 사도들의 예수가 되지 못하고, 이방인 구레네 시몬의 예수가 되었던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적인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정과 고난의 심정적인 동반자가 되어 그분의 생애와 같이 영원한 뜻과 섭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 홀로라도 하나님 앞에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고난의 주와 동참하는 사람이 되고, 재출발하는 부활의 주와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쌍하신 분이었습니다. 3년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간곡한 심정으로, 돌아가신 후 3일만에 부활할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무덤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원수인 로마병정이 지키고 있었으니 웬일이었던고! 오늘날도 기독교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지 못하고 로마병정과 같은 원수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로마병정을 둘러싸고 예수님의 무덤을 사모하는 무리가 이 땅에는 없는 것인가! 그 당시에는 이런 무리가 없었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 무리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나마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잃어버려 놓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찾아 3일간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자기의 몸둘 곳을 모르고 헤매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장 아끼던 세 세자인 베드로, 야곱, 요한까지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미명삼경(未明三更)에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었으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 등이 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국가의 반역자로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3일간 눈물 흘리다가 참다 못해 찾아온 그들이 제일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끝날의 성도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2-276
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마음자세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 허덕여야 할 끝날이 되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활의 주를 만나야 할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해서 무덤을 찾아 허덕이던 여성들이 먼저 부활의 주를 만난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부활의 주가 찾아오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자고 싶어도 자지 않고, 쉬고 싶어도 쉬지 않으면서 말할 수 없는 클클한 심정으로 산과 들을 헤매며 하늘을 위하여 서러운 눈물을 뿌리는 사람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놓고 사도들도 서러워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사도들이 아닌 무명의 세 여성이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서러워하였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으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헤맸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부활의 주를 누구보다도 먼저 만나게 했는데, 마찬가지로 끝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자기의 생명을 초월하여 자기 민족과 세계만민의 생명을 위하여 밤잠을 못 이루며 마음 조리는 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에 다시 찾아오시는 영광의 주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올 것이며, 여러분은 생각지 않은 가운데 주를 맞이하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누구에게 예수님이 나타났습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세 여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할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인데 그들이 엠마오로 가면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예수의 사정을 동정했고, 예수님의 슬픈 심정과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상의 동산, 끝날의 세계적인 새로운 영광의 날을 맞기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서러우신 예수님의 심정, 서글픈 예수님의 생애를 염려하고 애달픈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몸부림치며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입장에서 주의 영광을 바라는 자가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런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입니다.

사도들이 예수 앞에 적그리스도의 입장에 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택함받은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이 적그리스도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끝날에도 이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놓고 자신이 혹시 적그리스도의 입장에 서있지 않나 염려해야 합니다. 지금은 남을 비난하고 남의 일에 간섭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교단이 문제가 아닙니다. 끝날에 자신이 사탄이 될까봐 염려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남을 문제삼던 사람은 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역사노정을 거쳐 왔습니다.

여러분은 새에덴의 이상의 동산에서 만 우주가 바라는 영광의 부활을 기쁨으로 맞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심정을 느껴 함께 눈물 흘리며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영광의 부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끝날이 가까와 오는 때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심령기준에 도달한 자들은 클클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어도 기뻐하지 않고 불의 체험으로도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뛰쳐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타리를 치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자신을 찾아 세워야 하는 어려운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대표할 수 있고, 민족과 세계와 천주를 대표할 수 있는 참아들딸이 나타나야만 분열을 일으키려는 사탄의 공작을 다 분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갖추어 역사적인 노정에서 승리자가 되어 원수들의 죄까지도 책임지고 겟세마네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라면 비록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면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고난을 피하여 편안한 길을 택하는 자들은 그가 가는 길이 부활의 길인 줄 알고 가지만 결국 죽음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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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바쳐지는 산 제물의 생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예수님을 죽은 제물이 아닌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승리적인 조건을 찾아 세워야만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소망하여 오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부활의 영광의 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6천년 동안 수고하여 오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산 제물로 바쳐질 때 여러분은 영 육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6천년 동안 사탄 대하여 원한을 품었던 하나님의 고난과 슬픔을 종결시키는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고 온 우주만상 앞에 혹은 사탄 앞에, 혹은 천천만 성도들 앞에, 천군 천사들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영원한 이상의 동산에 들어가 영원히 그 동산에서 영광을 갖추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